황진수(한성대 명예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Ⅰ. 한국에서의 노인의 위상

우리나라 노인들의 현실을 녹록하지 않다. 2017년 현재 760만 명이 노인이고 노인의 숫자는 매년 40만 명씩 증가한다. 부부합계 출산율이 0.98명이라고 한다. 원래 평균 수급율이 2.1명이니까 이제 대한민국은 늙어가고 있다.

현재의 노인들은 대한민국 5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낸 분이 많다. 노인 중 80대 중후반에 계신 분들은 왜정시대, 6∙25전쟁, 산업화 이전의 배고픈 시절을 다 경함한 세대이다.

지금 노인 연령이 65세니까 막 노인이 된 세대는 선배 노인의 이러한 국가적∙ 사회적∙ 경제적∙ 개인적 환경을 전혀 모른다. 그러니까 같은 노인이라할지라도 ‘동시대인의 비동시적 존재’로 평가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노인 문제와 관련하여 몇 개의 금메달(?)을 가지고 있다. 노인의 빈곤지수 46.7%가 세계 1등이다. 또 여기에 보충되는 통계가 있는데 국민기초수급생활자의 33.1%가 노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 번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면서 자녀들을 양육하다보니 지금은 한마디로 빈 털털이 세대가 되었다.

노인은 외롭다. 다시 말하면 고독하다. 사회에서도 노인은 고독하지만 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옛날 농경사회시대의 가부장적 권위는 온데간데없고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 정말 첩첩산중에 혼자 있는듯한 노인들이 많다.

노인이 역할이 없다. 사람마다 자기의 역할(role)이 있는데 노인은 역할이 없다는 것이 노인을 더 괴롭힌다. 집안에서 TV시청이나 집 근처를 산책하는 것 그리고 경로당이나 노인복지관에 나가는 노인들은 그래도 행복한 노인이다.

위에 적시한 노인의 빈곤· 병약∙ 고독∙ 역할의 상실을 노인의 4고(苦)라고 말한다.

불가(佛家)에서 인생의 4고를 생로병사로 지칭하고 있듯이 노인도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을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모든 노인이 이렇게 4고에 허덕이고 있는가 하면, 사실 개인적인 생활에 만족하는 어느 정도 행복한 노인들도 많이 있다.

우리나라 노인의 또 다른 세계 1등은 자살률이다. 자살을 왜 하는가? 그것은 사람마다 다 사정이 다르겠지만 공통적인 것은 우울증이 기반되어 있다. 가족관계의 부조화·고독감 등이 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노인인구 증가 속도가 제일 빠르다. 다른 선진 국가가 100여 년에 걸쳐서 고령화사회(7%), 고령사회(14%), 초고령사회(20%)의 수순을 밟았다. 가장 빠르다는 일본보다도 우리의 노인인구 증가 속도는 세계 1등이다. 2000년에 7%였다가 2016년에 14%, 2024년에 초고령사회인 20%가 된다는 것이다. 노인인구가 많아지면 복잡한 분석도 필요 없다. 우선 노동력이 늙어진다. 그리고 사회의 활력이 떨어진다. 소비가 줄어지면서 내수 시장에 문제가 생긴다.

청년들은 노동생산인구이기에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만, 노인들은 생산에 참여하지 못하고 쓸모없는 잉여인간으로 취급당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노인이 죽으면 동네 박물관이 없어졌다고 슬퍼하지만, 한국같은 최첨단의 정보화·디지털화 사회에서는 쓸모 있는 정보가 없는 노인은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의 노인의 서글픈 현식을 정리했는데 고령사회 또는 초고령사회의 문제를 사회문제 특히 복지 문제로 정리하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자랑하고 있는 나라, 3050국가(5000만 인구에 3만 불 국민소득)군의 7개 국가에 속한다는 자부심이 있는 나라라고 하는 계량적·통계적 차원의 국가형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발전하면서 ‘회색쇼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데, 무조건적으로 오래 사는 것, 장수문화를 구가하는 것 대신에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할 시점에 도달했다. 노인의 4고를 사회정책 또는 국가정책으로 푸는 과정 즉, 노인의 인력활용, 소득보장, 여가선용, 자원봉사 등도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는 이러한 노년의 위기상황을 철학적 성찰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인류사의 새로운 사고의 틀을 만들어 보고자 함이 목적일 것이다.



Ⅱ. 철학의 대상으로서의 노년

인간의 태어남은 시작을 의미하며, 죽음은 곧 끝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기에 갓난아기의 탄생은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는 반면, 죽음을 대할 때면 사람들은 무겁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

로마시대 문인이자 정치가·웅변가로 활약했던 Marcus Tullius Cicero(BC 106~43)는 그의 저서 <노년에 관하여>를 통해 노년기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인식들을 대변하고 있다. 그 당시 사회에 면면히 흘렀던 에토스(ethos)는 사회의 질서와 공통의 관습, 공통된 가치관 또는 인식 등이었다.

로마시대의 노년을 바라보는 인식은 로마 공화정 시기와 로마 제정 시기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한 가지 예를 들면, 가부장 역할에 관한 것이다.

로마 공화정 시기는 한 가정의 우두머리인 남성 곧 나이든 아버지, 노인이 가부장으로서의 역할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이고, 로마 제정 시기는 가부장의 역할이 쇠퇴하거나 무능해지는 시기로 나타났다.

키케로가 <노년에 관하여>를 저술했던 시기는 대략 BC 43년경으로 그는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시저)가 등장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철학관련 저술활동에 몰입하였다.

<노년에 관하여>에서 적시한 노년기의 취약점 4가지는, 첫째, 노년은 노인의 활동을 저해한다는 것. 둘째, 노년은 신체를 허약하게 한다는 것. 셋째, 노년은 그들에게서 거의 모든 쾌락을 빼앗아 간다는 것. 넷째, 노년은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이 4가지는 키케로가 신체적 노년기를 정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키케로는 노년기와 신체를 말했는데 신체는 '수용하는 태도로서의 미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사회를 지배했던 스토아적 사유와 철학이 배경을 이룬다. 그가 내세운 활동의 제약, 허약함, 쾌락의 상실 등은 사실 상 노인의 특징이며, 신체적 징후라고 말할 수 있다.

키케로는 소외될 수 있었던 노년기라는 세대적 특징을 철학적 체제로 끌어냈다. 이는 우리에게 주는 가장 오랜 메세지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유기체는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노화를 겪게 된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철리(哲理)이고, 정상적인 변화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만연해있다. 의료기술은 노화를 늦추는 데 상업화되어 있으며, 미디어는 가난하고 무기력하며 병약한 노년의 이미지를 생산해내고 있다. 현재 우리는 노년이 노년에 의한 노년을 위한 정치·사회학적 권한과 의무를 행사하는 이상적 노인집단의 등장과 고령사회에 알맞은 정책적 대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절감하고 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노년연구는 기존의 의존적이고 부정적 고정관념을 반성하면서 노인 담론을 긍정적 의미로 전환해야 한다.

평균 수명이 60년 전후로 되어 있을 때 짜인 복지 정책이나 사회적 설계를 이제 100세 시대에 알맞은 방향타로 구축해야 할 것이다. 시몬 드 보브아르(Simon de Beauvior)는 생물의 숙명적 노화가 초역사적인 현실이기는 하나 그래도 그 운명을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체험된다고 지적하면서 원시사회로부터 현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노년의 체험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특히 현대에 들어서 노년이 사회적으로 어떤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받았는지를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Simon de Beauvior, 홍상희·박혜영 역 <노년>. 2002.)

또 최근에는 노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젊음을 동경하거나 젊음을 연장함으로써 가능한 한 노인의 늙은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부류는 성공적 노화(succesful aging) 또는 신노년집단이다.

성공적 노화는 잘 늙는 것(well-aging)을 의미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노화 모델이 새로운 노년학(New Gerontology)으로 자리 잡았고, 대중매체에서도 노년의 긍정적 부분에 포커스를 맞춘 신노년 담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 담론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공통적 견해는 나이가 들면 병들고 허약하며 가난한 모습의 노인이 아니라 노년에게 부여된 잘못된 기회와 공평하지 않은 대우가 사회에서 제공되기 때문에 노년의 모습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노년들은 보수를 받든 안 받든 사회와 지역을 위한 자원봉사의 자세가 되어 있으며, 자신과 가족을 위한 생산성을 증가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사회에서는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인지적으로 정상적이며 무능하지 않고 인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노인인구가 미국의 노년세대를 주도하고 있다.

또 한국사회에서도 신노년담론은 젊음의 연장 또는 젊은 노인이다. 한국의 주류 신문들도 늙음을 거부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며 지속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신노년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다루고 있다.

신노년담론은 크게 3가지이다.

첫째, 신노년은 활동적 노인으로 바쁜 노인이다. 이 경우는 활동성·생산성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참여하지 못하는 노인은 주변인물로 고착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둘째, 성공적 노년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것으로 모든 역량과 활동을 사사화(私事化)시킨다. 이 경우는 노년기의 휴업상태의 노인에 대한 불평등을 악화시킨다.

셋째, 결과적으로 신노년에 대한 찬사와 긍정적 의미부여는 반대로 저소독층, 장애노인, 무능한 처지의 노인을 더욱 주변화시키고 이들에 대한 사회정책의 대상으로 고착화시킨다.

노년이 무조건 가치 있다고 역설하는 것도 문제이다. 노년이기 때문에 갖는 다양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찾아내어 젊은 세대의 그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모색해야 한다. 봄철에 피는 아름다운 꽃과 안개도 아름답지만, 가을의 바위와 어울리는 단풍의 모습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모화상이 말한 것처럼 아침의 태양도 눈부시지만 저녁놀의 해지는 모습도 아름답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젊음의 연장이 아닌 노년 지혜를 인생의 한 과정으로 인정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 그리고 노년이 그 과정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사회가 지원해주는 것이 바로 노년철학의 과제이다. 따라서 노년철학, 구체적으로 인생의 마지막 장을 어떻게 장식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은 비단 노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절실한 공동체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정상에 올랐을 때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행복은 유예되거나 순간적으로 지나가 버린다. 동서양의 많은 철인(哲人)들이 지적했듯이 행복은 항상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있고, 그것을 소중히 여길 때 찾아오는 것이다. 최근 노년학에 관한 새로운 접근이 진행되고 있다. 노년공학(Gerontechnology)이 그것이다. 이는 노인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신체적·정신적·기능적 적응문제를 테크날로지를 활용하여 해결함으로써 노인과 노인부양자의 최적생활을 추구하는 연구이다.(황진수 외, 노년학의 이해, 대영문화사, 2000.) 이 노년공학이야말로 21세기 노년학이 초고령사회·장수사회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실천적 분야가 될 수 있다.



Ⅲ. 노년철학과 웰다잉(well-dying)

인간의 영원한 꿈은 오래살고 싶은 것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5복에서도 첫 번째가 수(壽)이다. 즉, 오래 살아야 부귀영화도 볼 수 있고 자녀들의 성공도 볼 수 있으며, 맛난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지난 100년 동안 인류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하는 성경 말씀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있다'로 바꾸어 놓았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계 평균 수명은 30세였다. 우리나라도 해방 전후의 평균 수명이 45세였다. 그런 사회적 현실이 이제 100세의 몸을 이루는 시기가 도래했다. 오래 사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장수노인의 증가로 인해 세상은 회색빛 세상이 전개되고 있다. 인류가 생성한 이후 가장 장수하는 사회가 도래하면서 이것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령사회문제를 복지정책으로 내세워 복지 수혜자들에게 합리적 대안을 실천하면 불평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포퓰리즘적 복지시책으로 복지 수요자들에게 퍼주다 보면 국가재정은 바닥이 나는 모순이 충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기에 노인이 오래 사는 것에 대한 추구를 계량적 차원에서 추구하다보면 의학적·생물학적으로 수명연장기법으로 귀착될 수도 있다.

또 노년의 인생을 사회 복지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인간의 모습은 노년에 대한 인문학적·철학적 접근이다. 죽음은 이별이다.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다는 의식이 있을 때 살아있는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것이고, 가장 불확실한 것은 언제 죽느냐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기본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스리며 부귀영화를 꿈꾸기도 한다. 불교의 예를 들어본다. 중생들은 몸과 마음이 아플 때는 증상에 따라 약사여래를 찾는다. 자비심이 부족해서 자신의 삶의 문제가 생길 때는 관세음보살을 찾았고, 지혜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문수보살을 찾았다. 또 입으로만 말할 뿐 실천이 부족할 때는 보현보살을 찾아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미타불에 극락왕생을 빌기도 하였다. 종교의 영이 불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종교가 거의 유사한 희구의 자세로 인간의 복덕을 추구한다.

죽음이란 인간 최고의 스승이다. 죽음에 대한 의미를 각성하고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바로 노년철학이다. 미국의 스티브 잡스가 암 진단을 받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연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럼 당신들은 정말로 잃을 게 없다"는 말을 함으로써 감동을 주었다.

여기에서 추가로 논의하고자하는 것은 웰다잉(well-dying)이다. 흔히 웰다잉은 웰빙(well-being)이라고 말한다. 웰다잉이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를 대상으로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등의 연명치료를 중단하여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죽음을 맞이 했을 때에 존엄사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이는 의학적·간호학적 측면에서 보는 웰다잉이고 철학적 입장의 웰다잉은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을 선택하는 것'으로 말한다.

불교에서는 신해행증(信解行證)으로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것과 죽음의 문턱에서 과거에 내가 실행했던 베풂· 나눔· 섬김에 대한 기억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노년의 특징을 4D로 표현한다. 질병(disease), 장애(disability), 치매(dimentia), 의존(dependency)로 집약한다. 인간이 죽음에 대한 사유의 틀을 4가지로 가치 체계를 세우고 있는데 첫째, 생물학적 죽음이다. 이는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이고 삶의 본질적 문제를 파헤치고 있다. 둘째, 종교적 입장의 죽음으로 죽음이후 인간의 운명을 다룬 것으로 불멸과 부활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하여 삶 이후의 삶(life after life)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셋째, 철학적 입장의 죽음은 나는 과연 나의 죽음을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의 문제를 발전시켜오고 있다. 넷째는 죽음의 공포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죽음의 이해와 실천의 문제를 연구하여 왔다.

이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의 철학적 견해가 있다. 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죽음이 괴로울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절대 괴로움이 될 수 없다는 에피쿠로스(BC 341~271) 주장 ②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려면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스토아학파의 주장 ③ 인간은 절대로 죽음을 정확이 알거나 직시할 수 없다는 스피노자(1632~1677)의 주장 ④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죽음을 가지고 온다는 주장 ⑤ 죽음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쇼펜하우어(1788~1860)의 주장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의 공포에 대한 유무를 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있다.(김인종. 노년기 죽음에 관한 종교와 복지의 관계의 철학. 2001.)

죽음은 인간만의 대화주제이다. 다른 생물이나 동물은 죽음을 소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인간만이 오직 죽음을 죽는다. 인간이 만든 것 가운데 가장 규칙적이고 엄정한 것은 무엇인가. 공산품이 아니다. 인공위성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의식, 종교적 의식이다. 죽음은 의식에 의해 문화가 되었다.(김열규.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궁리. 2001.)

죽음은 삶의 텍스트며 담론에서 어느 경우에나 종지부가 찍히고 나면 오직 그것뿐이다. 더 이상 죽음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다. 죽음을 기억하라(momento mori)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몰아내고 있지만 죽어서 남의 뇌리 안에 자리 잡지 않는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인간들이 죽음을 극복이 아닌 수용의 자세로 맞이했다면, 근대 이후의 인간들은 과학을 통해 죽음이라는 자연을 정복하는 현세 중심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래서 김열규는 '죽음이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김기봉, 고령화에 대한 역사적 성찰, 문화비평) 죽음에 관한 논의가 깊어졌는데 죽음을 의례적·형식적 차원에서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인도는 상여 문화가 없다. 죽은 사람을 사리(옷)으로 말아 화장터로 간다. 거기에서 평등하게 화장(火葬)을 한다. 티베트는 죽은 자를 자루에 넣어 소등에 태워 사찰 부근의 천장 터로 간다. 시신을 작두로 잘라 독수리 먹이로 준다.

몽골의 경우는 죽은 자를 마차에 싣고 달리다가 시체가 떨어진 곳에 봉분 없이 평장을 한다. 말하자면 자라나는 풀에게 보시를 하는 셈이다.

중국의 운남성 소수민족의 경우 바위 절벽에 시신을 안치(?)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새들과 짐승과 바람에게 먹이가 되도록 한다. 네팔은 화장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시신을 강에 수장하여 물고기에게 육체 보시를 한다. 인도의 타르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화장할 나무도 없고 강물도 없이 사막의 공동묘지에 죽은 자의 평소 옷을 입힌 채 그대로 두고 떠난다. 시베리아 에스키모인들은 노인을 썰매에 태워 1달 정도 먹을 식량을 주고 멀리 가서 버리고 온다. 노인은 한 달 정도 살다가 얼음 위에서 죽고 물고기나 곰의 식량이 된다.

위의 사례와 다른 장자(莊子)의 경우를 보자. 장자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제자들을 불렀다. 무슨 일을 그리 부지런히 하는가? 제자들은 "위대한 스승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옥관과 석관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래야 제자 도리를 다하는 것이고 스승에 대한 예의를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장자는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나의 관(棺)으로 삼을 것이며, 해와 달로 무덤의 석등(石燈)을 삼고 하늘의 무수한 별들로 상여의 장식을 이룰 것이니 만물은 있는 그대로 제물로 삼아라"고 했다.

제자들은 "스승님 말씀이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몸을 맡겨두라'는 말씀이신데 독수리· 솔개· 까마귀가 스승님 몸에 생채기를 낼까 두렵다"고 말씀드렸다. 장자는 "땅 속 깊이 옥관과 석관에 둔다면 개미·구더기가 득실거린다. 하나를 알고 둘을 모르는 현상계 집착이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장자 철학에 의하면 존재론적·인식론적·가치론적 측면에서 모든 만물은 하나인 것이며, 모두가 평등하다. 삶과 죽음, 유년기와 노년기도 평등하다고 보았다.

선진(先秦) 유가에서는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의 세계와 죽은 이후의 세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공자에게서는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느냐고 하여 삶 이후의 세계에 언급한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늙고 죽는다는 것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부과된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만이 죽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 이전의 인간들을 죽음을 수용하는 자세로 맞이하고 종교적 형식을 통해 죽은 자와 소통하였다면 현대 세계로의 인간들은 과학을 통해 죽음이라는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모습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노년철학이 지향해야 할 대상을 찾기 위해 대상의 모색, 노년철학의 종국적 도착지점을 삶과 죽음을 논의하면서 그동안 진행된 담론의 일부를 제시하였다.

일반적으로 노년의 삶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간난의 고통을 우리는 법· 정책· 제도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철학적 배경, 곧 노년철학의 고뇌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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