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김창룡 특무대장이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출근길에서 허태영 대령 등에 의해 사살된다. 암살 소식을 듣자마자 이승만은 병원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비통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그 날짜로 김창룡을 육군 중장으로 추서하였다. 그는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운 것이다."라고 말하고 비문을 직접 써서 보낸다.

군은 전국에 비상경계망을 펴고 범인 검거에 나선다. 따라서 장병들은 휴가와 외출이 금지되었다. 2월 3일이 되자 전 육해공군 부대에 조기가 게양되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국군의 장이 거행된 것이다. 이것은 모두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내려진 조처들이었다.

죽자마자 곧바로 중장으로 추서되고 전국에 비상경계망이 펴지고, 국군의 장으로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상상이 쉽게 가지 않는 일이다.

북한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창룡은 남으로 내려와 이제 군부 내 좌익들을 색출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남로당 간부 이재복과 이중업 등을 체포하고, 거물급인 김삼룡, 이주하의 손에도 쇠고랑을 채웠다.

그는 공로가 인정되어 1948년 육군 대위로 승진하여 육군본부 정보장교 보직을 받는다.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토벌사령부의 작전 장교로 참여하게 된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여수에 주둔 중인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일으킨 여순사건은 정부의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 2,500여 명이 희생되는 불행을 불러온 후 막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반공국가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군부의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진행한다. 이때 이승만과 숙명적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김창룡이다. 그는 여순 사건 당시 뛰어난 수사 정보력으로 5000여 명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순사건 진압 후 이승만과 김창룡의 독대가 잦아 지는데 그들은 이를 통하여 점차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속도는 김창룡이 점차로 특무부대를 손에 쥔 정치군인이 되어가는 빠르기와 비슷하였다.

박정희 소령이 체포된 것은 1948년 11월 경이었다. 그의 친형 죽음이 원인되었다고 하지만 남로당 군사총책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군부 내 남로당 명단을 넘기면서 무기징역으로 선고받는다. 이어 그는 1949년 1월 18일 징역 10년으로 감형되면서 형집행정지에 이어 강제 예편되었다. 1948년 12월 1일 민주주의 근간을 위태롭게 하는 반 국가단체의 활동을 막기 위해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점을 감안하면 그의 목숨은 거의 천운에 가깝웠다고 할 수 있다. 사건 담당자인 김창룡이 박정희에 대한 신원보증서 겸 구명 사유서를 만들어 당시 숙군 관련의 전권을 쥐고 있던 백선엽 정보국장을 찾아가서 결재를 받아낸 것이다.

김창룡은 1950년 8월 1일 부산 방첩대(CIC) 대장이 되었고 서울 수복 후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평양지구 특무대장, 부산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 등을 거치면서 김창룡은 35세의 나이로 수사권을 독점하였고 이승만과 직접 통화하며 비밀정보를 주고 받고 있었다.

1949년 1월 방첩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6월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가 방첩대 소속 현역 육군포병 중위였으므로 방첩대장인 김창룡은 지금도 배후로 의심받고 있다. 또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국립묘지 안장의 자격시비가 일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건군초기 군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을 적발해 대한민국의 전복을 미연에 막은 중심역할을 한 인물’이라거나 ‘1년 후에 터지는 동족상잔의 대 전란을 앞두고 적어도 군내의 좌익 조직을 일소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으로서도 다행’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반공국가가 아직도 미숙한 자유민주주의 이름으로 이 땅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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