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동양일보) 우리는 합리적인 개인일까? 주워진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여 가장 최선의 대안을 선택하고 있나? 지난 몇 주 동안 국회에서 선거법 개정안과 사법개혁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놓고 여야 간에 벌어진 극단적 행태를 보면서 우리는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 1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금융 위기 때인 2008년 4분기 이후 가장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0.3%)을 기록하였다는 충격 속에서도 국회는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왜 ‘동물국회’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도 변하지 않을까. 똑똑한 국회의원 개개인이 모여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을까.

어느 심리학자가 남자 1명을 길모퉁이에 세워놓고 텅 빈 하늘을 60초 동안 처다 보게 하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행인들은 그냥 지나쳤다. 다음번엔 5명이 똑 같은 행동을 하도록 했다. 길을 가다 멈춰 서서 빈 하늘을 응시한 행인은 이전 보다 4배 많아졌다. 15명이 처다 보았을 땐 길 가던 사람 가운데 45퍼센트가 멈춰 섰으며, 하늘을 응시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자 무려 80퍼센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처다 보았다고 한다.

1968년 미국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이 실시한 실험의 결과이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이 하는 행동이나 믿음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실험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정말 볼 것이 없다면 많은 사람이 쓸데없이 하늘을 응시하겠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에 따라 한다는 것이다. 왠지 따라하지 않으면 집단에서 소외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더도 덜도 말고 중간만 가라’는 말도 있다. 눈치를 잘 살펴 집단의 눈 밖에 나지 말라는 경고이다. 여기에서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들의 이러한 동조 현상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 실험이 미국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시(Solomon E. Asch)의 동조 연구(conformity research)이다. 정답이 A인 매우 쉬운 문제에서 실험 참가자 5명중 4명이 정답을 C라 답하였다고 했을 때, 정답이 A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를 연구하였다. 놀랍게도 실험 참가자 중 75퍼센트가 적어도 한 번은 다수의 의견을 따라 틀린 답 C를 말했다고 한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소신을 접고 다수의 편에 서서 동질감과 소속감을 선택한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독립적인 개개인은 아닐지 모른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특정 집단의 한 구성원으로 시류(時流)에 편승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부화뇌동(附和雷同)이 우리 행동의 기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가치관과 뚜렷한 소신이 없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부화뇌동 말이다. 그렇다고 부화뇌동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떤 사회든, 조직이든, 단체든 많은 구성원이 공동규칙을 공유하고 이에 동조해야만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다. 따라서 동조는 한 단체의 존재를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 어떤 집단이 공통의 가치를 공유하고 상호 간 신뢰를 바탕으로 단합된 마음을 가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부화뇌동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구성원간의 응집력을 강화할수록 조직은 특정 결론에 대한 의견 일치를 지나치게 추구하면서 구성원의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생각과 의견을 억제하게 된다. 대외적으로 폐쇄성을 가지게 되고, 간혹 구성원 일부가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이면 집단 충성심을 강요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패거리 문화가 판을 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국회가 보여주는 모습이 그런 것 아닐까. 나의 동조는 정의에 부합하는 소신이지만 너의 동조는 추악한 야합이라는 좁힐 수 없는 간극 때문에 생기는 비극 말이다. 그래서 그 간극을 없애거나 좁히지 않으면 앞으로도 언제든 유사한 사태가 반복해서 발생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간극을 메울 수 있을까. 그 시작은 집단에 메몰 된 개인을 바로 세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만 개인은 보이지 않고 집단만 보이는 패거리 문화를 청산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개인을 넘어 화이부동(和而不同)하는 개인이다. 자기의 소신을 버리고 줏대 없이 따라가는 개인이 아니라 화목하게 지내지만 자신의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는 개인 말이다. 이러한 화이부동형 개인이 육성될 수 있는 문화와 제도적 여건이 마련될 때 자연스럽게 패거리 문화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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