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영 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동양일보) 엊그제 아키히토 일왕이 건강과 고령을 이유로 퇴위했다. 일본 왕실에서 생전에 왕위를 물려주는 것은 첫 사례라서 특례법을 만들어 진행했다고 한다. 왕위는 장남인 나루히토 왕세자가 이어받았으며 이로써 30년 동안 연호로 사용되었던 ‘헤이세이(平成)’ 시대는 막을 내리고 새 왕의 연호인 ‘레이와(令和)’ 시대가 시작됐다.

아키히토 일왕. 그는 재임 기간동안 평화에 대한 신념과 전쟁에 대한 반성을 숨기지 않았던 평화주의자였다. 그의 마지막 인사말도 ‘헤이세이’가 전쟁이 없는 시대로 끝나서 안도가 된다며, 새로운 ‘레이와’ 시대가 평화롭게 결실을 맺기를 왕비와 함께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했다.

사실 아키히토 왕은 아버지 ‘히로히토’ 시대의 전쟁의 그림자를 안고 출발한 왕이다. 정치적 실권은 없지만 일본의 상징적 존재로서 그동안 일본의 과거사와 관련해 우리나라에 여러 차례 양심 발언을 표명해 왔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 “일본에 의해 초래된 불행한 시기에 한국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면,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했고,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는 “한반도의 여러분들에게 다대(多大)한 고난을 안겨준 시기가 있었다. 몇 해전 이에 대한 나의 깊은 슬픔을 표명했고, 지금도 변함없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미안해 했다.

그리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방일했을 때는 “한때 일본이 한반도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시기가 있었다. 그에 대한 깊은 슬픔은 언제나 제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고 다시 한번 미안함을 강조했으며, 한일 월드컵에 즈음한 2001년 기자회견과 2011년 생일 기자회견에서는 “헤이안(平安)시대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쓰여 있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며 공식적으로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 8월 15일 일본의 2차대전 패전일에 열린 희생자 추도식에서는 “과거를 돌이켜 보며 깊은 반성을 한다”고 말해 보수 우경화로 치닫는 아베 총리와 상반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재위기간 필리핀과 사이판 등 전쟁 피해지역을 방문해 사죄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도 했다. 1992년 중국, 2006년 싱가포르·태국, 2009년 하와이 등 과거 일본이 저지른 전쟁으로 피해를 본 나라를 방문해 위령비에 참배했고, 2005년엔 사이판의 한국인 전몰자 위령지인 ‘한국평화기념탑’에 참배했다. 2007년에는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지하철 선로에 추락한 일본인을 구하다가 숨진 의인 이수현 씨 추모영화 시사회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와 이런 점이 크게 달랐다.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 총리와는 줄곧 불편한 관계였다. 개헌을 추구하며 군국주의로 치닫는 아베 총리의 보수 우경화 행보에 아키히토는 깊은 우려를 나타내 왔다.

아키히토 일왕의 남다른 점은 평화주의자이면서 사회적 약자의 편이었다는 점이다.

왕실 역사상 처음으로 평민 출신과 결혼해 화제를 모은 그는, 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가난한 사람과 지진 태풍 등 재난 피해자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등 서민들의 눈높이에 맞춘 행보로 일본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제 그는 상왕의 자리로 물러났고 역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나루히토 일왕도 아버지 뒤를 잇는 평화주의자였으면 좋겠다. ‘레이와(令和)’가 공기는 맑고(아름답고) 바람은 온화(和)하다라는 뜻을 취한 연호라니 아버지 ‘헤이세이(平成)’시대처럼 부디 앞으로 일본이 군국주의 우경화를 종식시키고 평화주의로 나가길 바란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번 새 왕의 즉위식에 일본 왕실의 성년 남성들만 참석하고 여성들은 참석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남의 나라 왕가의 법도라고 하지만, 이것도 고쳐야할 여성차별적 구습이다.

이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고독한 자리에서 내려선 아키히토 일왕이여. 부디 남은 생애 건강하고 인간적인 행복한 삶을 누리시라.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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