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희 청주시흥덕구 지적팀장

박선희 <청주시흥덕구 지적팀장>

(동양일보) 작년 5월 초 봄이 한창이었음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며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어느 날 아이들의 치과 진료를 위해 토요일 오전 병원을 방문했다. 이른 아침부터 많은 환자들로 북적여 우리는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병원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느 모자가 있었다. 70대 후반의 노모와 50대 초반의 아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몹시 지치고 힘든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자리를 양보해 내 옆에 앉게 된 두 모자를 의도치 않게 바라보았는데 노모는 계속 한숨을 쉬시고 아들은 초점 없는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아들에게 장애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몸은 이미 중년이었으나 아직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들이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기름 냄새가 나서 둘러보니 노모가 손에 든 검정 비닐봉지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노모는 채소전을 꺼내 아들의 손에 쥐어주고 두유 병을 따주며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며 애달픈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의 아들이 채소전과 두유를 다 먹고 난 뒤에야 자신의 입에 구겨 넣듯 전을 밀어 넣으며 찬물 한 잔으로 숨을 고르는 노모의 모습에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고 아리게 아팠다.

굽은 등과 주름진 얼굴, 그리고 노모의 한숨에서 나의 친정엄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01년 12월 중순 친정엄마가 전화를 걸어 난데없이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초여름 무렵부터 어깨에서 시작해 다리까지 저림 증상이 이어졌지만 나이로 인한 관절통쯤으로 생각했는데 혹시나 해서 찍은 CT에서 목덜미 바로 위 악성종양이 발견됐다.

뇌종양! 청천벽력 같은 얘기였다. 의사는 당장 입원해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했지만 엄마는 집 정리하고 다음날 입원하겠다고 우기고는 목욕탕에서 목욕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와 밝은 목소리도 별일 아닌 것처럼 전화를 하신 것이다. 수술을 위해 입원을 하고 머리를 깎는 날 엄마의 두 손을 꼭 잡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수술실에 들어가며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시고는 “다녀올게”하시며 끝까지 씩씩한 모습을 보이셨다. 그 덕분에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물론 회복도 잘하셔서 근 10년을 건강하게 지내셨다.

2010년 9월 말 우리 가족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다. 산을 좋아하던 작은오빠는 히말라야를 등정하다 끝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는 부모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 어떤 고통보다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이듬해 작은오빠 일로 많이 약해지신 친정 부모님을 위해 예약한 종합검진에서 친정엄마는 두 번째 암 진단을 받았다. 이번엔 대장암. 정말 절망적이었다. 이런 사실을 엄마께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고민을 하던 자식들의 얼굴을 본 눈치 빠른 엄마는 “왜? 암이라도 걸렸니? 걱정 마. 그까짓 꺼 수술하면 되지.” 이러시며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했다.

대장암 수술도 잘 마치고 이제 9년이 지났다. 건강관리도 열심히 하시고 아직도 직장을 갖고 일을 하시는 엄마는 나에게 영웅 같은 존재다.

어느 날 엄마와 대화 중 나이가 쉰이 된 딸을 아직도 애 취급을 하시 길래 “엄마, 이제 내 나이도 쉰이에요. 애가 아니라고요.” 했더니 엄마는 “내가 죽을 때까지 너는 나에게 아기야”라고 하셨다.

그렇다. 부모의 마음은 그런 거였다. 나 역시도 스물이 넘은 아들을 아직도 아기처럼 생각하는 걸 보면 부모에게 자식은 늘 보살펴줘야만 하는 아기인 것이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고 계시니 지금부터는 자식에게 기대도 좋으련만 나의 엄마는 아직도 나의 든든한 울타리, 지원군이 되어주신다. 철없는 얘기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내 나이 60, 70이 되어도 나를 아기처럼 돌봐주시는 엄마가 함께 하시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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