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동양일보 김영이 편집국장 겸 상무이사) 30여년 전인 1990년, 청주에 수영선수들을 위한 장학회가 탄생했다. 명칭은 오송수영장학회.

당시는 보로 막은 냇가에서 훈련하며 전국소년체전에서 숱한 금메달을 안겨준 충북 수영의 명성을 여전히 이어가던 때였다. 바다가 없는 충북에서 전국 수영을 제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 수영계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역사로 기록된 ’충북수영 쿠데타’였다.

그런 만큼 장학회를 결성해 수영선수들을 돕는다는 그 자체만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도와 준 선수가 대회에서 메달을 따 양손을 번쩍 들고 환호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뿌듯하고 보람있는 일인가. 이건 단순히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와 희열을 안겨주고도 남는 일이다.

그런데 오송수영장학회 설립 주역이 ‘검사장’이라는데 다들 놀랐다. 장본인은 정경식(82) 전 청주지방검찰청검사장. 그와 유성종 전 충북도교육감, 황창익 전 충북은행장, 김동수 전 한국도자기회장, 차주원 전 평곡산업회장, 김헌대 전 충북수영연맹회장 등이 5000만원을 출연, 장학회를 출범시키고 수영선수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후 충북수영연맹의 강습사업수익금 출연 등 2억5000만원으로 몸집을 불려 2001년 이름을 오송장학회로 바꾸고 장학금도 수영뿐 만이 아닌 다른 종목 선수로 확대해 지급하고 있다. 현재 13명의 이사가 매년 내는 회비(1백만원)로 장학금을 주고 있다.

정 전 검사장은 청주를 떠나 헌법재판관을 거쳐 지금은 서울 모 법무법인 고문변호사로 있다.

TK(대구경북) 출신인 그가 생뚱맞게 고향도 아닌 청주에서 수영장학회를 설립하자 일각에서 불편한 시선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오래 근무하지도 않고 떠날 사람이 무슨 장학회냐는 반응이었다. 당시 시대 정황상 검사장이라는 직책의 무게까지 더해져 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요즘 같으면 무슨 정치판에 뛰어들려는 속셈으로 비쳐졌을 게 분명하다.

“수영 꿈나무를 잘 길러 보자”는 그의 진정성은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드러났다.

정 전 검사장은 청주를 떠났어도 장학회와는 인연을 끊지 않았다. 2010년 창립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이시종 충북체육회장(도지사)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그는 3년 전에도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해 끈끈한 정을 나눴다. 지금도 그는 수영 관계자들과 수시로 교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는 흔히 있는 자, 힘 있는 자의 도리를 다하라는 의미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많이 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점점 심각해지는 각박한 세상에서 ‘나’보다는’ 우리‘를 생각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단지 돈을 많이 기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질돼 가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회에 환원하지 않는다면 가치를 잃은 돈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나눔 행사가 많이 열린다. 이들 현장에는 어린이집·유치원 어린이부터 초·중·고 학생들, 몸이 불편한 장애인, 시장 상인, 농민, 직장인 등이 십시일반 성금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이같은 따스한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건전하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아직도 많다. 대기업을 비롯한 많은 기업들이 지역에서 이윤을 추구하면서 정작 주위를 돌아보는 데는 인색한 것 같다. 특히 법원, 검찰, 경찰 등 소위 권력기관장들은 이 분야에서 ’치외법권‘으로 남아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이들은 지역의 주요 행사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다. 신분 노출을 최소화해야 하는 입장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나 행사 참여가 자신들의 격을 떨어뜨린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남모르게 기부하고 불우이웃을 돕고 있다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런 기관장들은 청주에서 1~2년 근무하고 훌쩍 떠나면 그만이다. 이력서에 ’충북 근무‘ 한 줄만 추가하면 끝이다. 하지만 기관장 역할이라는 게 단순히 업무만 챙기는 것에 그쳐야 할까. 주변을 두루두루 살피는 섬세함과 자상함을 보이면 안될까. 어떤 식으로든 근무지에 족적을 남길 필요는 있다. 정경식 전 검사장처럼 장학회까지는 아니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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