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겁의 세월, 오랜 풍상과 태고의 신비를 간직

단양 고수동굴
단양 고수동굴

 

(동양일보) 살다보면 이따금 숨구멍이 필요하다. 나만의 자유를 갈구하며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 수많은 생명의 숲에 온 몸을 맡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존재의 운명이 깃들어 있다. 아픔의 마디를 이겨내지 않고 자라는 것들은 없다. 나무와 새와 다람쥐와 꽃들과 계곡과 성곽의 이끼들도 저마다의 아픔을 견디며 존재의 가치를 빚어왔다.

삶이 고단할 때는 숨구멍을 찾아 자연으로 달려간다. 그 견딤의 미학, 낮고 느림의 가치, 겸손과 나눔의 의미가 무엇인지 느끼게 된다. 바람에 나부끼는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 길 위의 나그네 무심한 눈길에 맑은 미소가, 삶의 여백이 생긴다. 어느 시인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씨앗은 땅속에서 두근거리고, 꽃들은 햇살을 보며 두근거린다. 꿀과 나비는 꽃심을 보며 두근거리고, 새들은 숲의 비밀을 보며 두근거린다.

사람도 하루에 십만 법 넘게 두근거린다. 삶이 곧 두근거림이자 설렘이며 기적이다. 꽃 한 송이가 밥 한 그릇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 떠난 단양의 동굴탐험은 더욱 그러했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고 했지만 빛 이전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이 땅의 모든 생명의 본질이다. 어둠에서 시작돼 어둠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둠속에 있으면 왠지 불안하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살지 막막하다. 보이지 않는 그 세계가 되우 궁금하기도 하지만 두려움이 더 많다.

단양은 산이 깊고 물과 계곡도 깊다. 그 깊이만큼 땅 속은 더욱 깊고 애매하다. 대부분이 석회석 지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데 전국에서 동굴이 가장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256호로 지정된 고수동굴은 그 길이가 1,700m에 달한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그 속으로 내 몸이 빨려들어간다. 궁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지만 동굴 속에서 싸늘한 찬바람이 밀려오던 온 몸을 그곳에 맡겨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비밀의 문이 하나씩 열린다.

동굴 속에는 다양한 형태의 종유석과 석순들로 가득하다. 산속에서 잔잔히 스며드는 빗물과 공기와 맞닿아 이루어진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억겁의 세월, 오랜 풍상을 통해 하나씩 다듬어지고 쌓여진 것이다 그래서 그 형태에 따라 저마다의 신화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럴듯한 이름도 지어졌다.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는 마리아상, 힘찬 날갯짓이 돋보이는 독수리바위, 실제 도담삼봉을 쏙 빼닮은 도담삼봉바위, 1년에 0.1mm씩 자라 수 만 년 후에나 만나게 될 종유석과 석순의 안타까운 사랑이 서린 사랑바위, 푸른 하늘을 옮겨온 듯 경이로운 천당성벽 등 동굴 안 세상은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 길고 느린 동굴 속으로 빨려들어갈 때마다 온 몸이 감전될 것 같은 신비가 있다. 오직 자연이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단양 천동동굴
단양 천동동굴

 

다리안관광지와 나란히 하고 있는 천동관광지에도 동굴이 있다. 소백산 깊은 골짜기에서 내려온 맑은 계류와 울창한 숲이 청정한 기운을 뿜어내는 천동계곡 주위로 쉼터와 오토캠핑장 등의 시설이 있는데 충청북도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된 천동동굴은 그야말로 비밀의 숲이다. 1976년 주민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그 역사만 해도 4억 5천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동굴로 들어갈 때는 몸을 잔뜩 웅크려야 했다. 귀한 것일수록 낮고 좁은 길을 지나야 하는 법이다. 천동동굴은 지하수의 침투량이 많지 않다.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의 양도 적고, 종유석과 석순의 생성도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동굴 속의 형태 하나 하나가 섬세하다. 여무는 시간도 더디다. 화려한 색채와 수려한 내부 풍경이 으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꽃쟁반을 간직한 동굴’이라며 예찬하고 있다.

고수동굴보다는 크지 않지만 그 형태와 문양이 예사롭지 않다. 위로 솟구쳤다가 다시 아래로 이어지는 동굴의 지형이 흥미롭다. 종유석과 석순도 섬세하고 아름다워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지나온 시간의 역사를, 자연을, 생명을 탐험하는 느낌이다.

천연기념물 제262호 노동동굴도 있다. 남한강 줄기가 충주호 북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노동천 부근에 위치해 있는데 그 길이가 800m에 달한다.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석주 등으로 가득하다. 이곳에 토기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주민들이 이곳으로 피난했던 흔적이다.

온달산성 밑에도 동굴이 있는데 그 이름이 온달동굴(천연기념물 제261호)이다. 온달 장군이 수양을 하던 곳이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동굴 높이는 2m, 길이는 700m에 달한다. 4억 년 전의 지질연대를 보이고 있으며 동굴이 만들어진 것도 10만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종유석과 석순의 발달은 주변의 동굴에 비해 빈약하지만 지형경관이 화려하다. 다시금 이 땅의 모든 생명은 어둠에서 시작되었음을 묵상하다. 어둠속의 생명은 빛의 통로를 따라 잉태되고 자라며 더 큰 성장을 하게 되었으니, 어둠은 신비다.

■ 글·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 사진·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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