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희 논설위원/소설가/한국선비정신계승회장

 

강준희 /논설위원/소설가/한국선비정신계승회장

(동양일보) ‘하늘이 내린 죄는 피할 수 있어도 자기가 지은 죄는 피할 수 없다’ 서경(書經)에 있는 말이다. 옛 도둑들은 도둑질을 할망정 과부와 고아, 효자와 열년, 신당과 절간의 물건은 훔치질 않았다. 이를 도도삼강(盜道三綱)이라 한다. 도둑들이 지켜야 할 세 가지 벼리란 듯이다. 비록 도둑들이지만 얼마나 양심적인 도둑들인가. 그리고 또 얼마나 반듯한 도둑들인가. 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을 불한금(不汗金)이라 하고 그런 무리들을 우리는 불한당(不汗黨)이라 한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고 흘리는 땀이나 떳떳지 못한 짓을 할 때 흘리는 땀을 한출첨배(汗出沾背)라 한다.

서양에서는 15세기까지 장관이나 내각원, 또는 공사 외교사절을 일컬어 미니스터(minister)라 칭해 그 지위를 아주 격하시켰던 일이 있었다. 미니스터란 장관, 내각원, 공사, 외교사절, 성직자, 시행자. 신의 심부름꾼 뭐 이런 뜻이지만 동시에 하인, 종, 공복, 신(臣), 부하 등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ze)라는 것도 있어 이도(吏道)와 사회기강의 척도로 삼았다.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의상의 의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즉 신분에 상응하는 도의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게 없었던 건 아니어서 고려조의 최충 등이 주창, 관리들의 행동강령과 신하들이 지켜야 할 직분을 명시해 관청의 벽에 게시한 육정(六正)이라는 게 있었다. 즉 성신(聖臣), 양신(良臣), 충신(忠臣), 지신(智臣), 정신(貞臣) 직신(直臣)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 나라를 망치는 신하로 사신(邪臣), 구신(具臣), 유신(諛臣), 간신(奸臣), 참신(讒臣), 적신(賊臣)의 육사(六邪)라는 것도 있었다.

천지조판 이후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군주의 하늘이었다. 이를 본딧말로 쓰면 ‘민자국지본이군지천(民者國之本而君之天)’이다. 필자는 몇 번에 걸쳐 시경(詩經)의 말을 인용해 탐관오리는 망국지상임을 천명한 바 있다. 조선조 영조 때의 청백리 유정원(柳正源)은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지만 고을을 떠날 때는 언제나 채찍 하나로 길을 나섰다. 그가 벼슬을 사임하고 집에 있을 때 하루는 아들이 그가 원을 살 때 쓰던 농짝을 열어봤다. 그런데 농짝은 짚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다. 역시 성종 때의 청백리 이약동(李約東)도 제주 목사로 있다 돌아올 때 채찍 하나만 달랑 들고 관아를 나섰다. 그러다 이 채찍도 이 섬 제주의 물건이라 하여 관아의 다락에 얹어 놓고 왔다. 그 후 제주 사람들은 이 채찍을 보배처럼 간직해 새로 목사가 부임할 때면 이 채찍을 벽 위에 올려놓고 우러렀다. 세월이 흘러 채찍이 삭아버리자 그 자리에 그림을 그려놓고 그 뜻을 길이길이 기렸다. 태조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35년이나 벼슬길에 있던 유관(柳寬)은 비가 새는 집에서 임금이 하사한 일산을 받고 살았다. 성종 때의 재상 손순효(孫舜孝)는 평생을 청빈 일변도로 살다 죽었는데, 죽을 때 자식들을 불러 놓고 너희들이 알다시피 이 애비는 초야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너희에게 물려줄 아무 것도 없다. 있다면 다만 ‘없는 것’을 물려줄 뿐이다 하고는 가슴을 가리키며 “얘들아! 이 애비 가슴 속에 더러운 것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다. 너희도 그렇게 살아라!”하고 눈을 감았다. 동부승지, 호조참판, 우참찬, 한성판윤 등 이 외에도 숱한 벼슬을 한 박수량(朴守良)은 30여년의 관작생활에도 집 한 칸 없는 청백리였다. 그가 죽자 임금(명종)은 그의 무덤에 비(碑)를 내렸는데 그 비가 글자 한 자 없는 백비(白碑)였다. 너무도 청렴하게 살아 비에 글자(비문)를 쓴다는 게 오히려 더럽다 하여 백비를 세웠던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박수량의 백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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