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강사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는 “인생의 각 시기에는 그를 움직이는 각각의 원동력이 있다”고 말했다. “10세 때에는 과자에, 20세 때에는 연인에게, 30세 때에는 쾌락에, 40세 때에는 야심에, 50세 때에는 이욕에 끌린다. 도대체 언제 인간은 지혜만을 쫓게 되는가?”(<에밀>, 1762). 기적적으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유대인 정신분석학자 빅토르 프랑클의 말은 무겁다. “나치스 수용소에서는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먼저 살아라, 그리고 삶에 대해 사색해라)’라는 라틴어의 교훈은 소용없다. 수용소에서 유효한 것은 오히려 이 교훈과 반대의 것이다. 그것은 바로 ‘primum philosophari, deinde mori.(먼저 철학하라, 그리고 죽어라)’이라는 교훈이다. 그 외에 유효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궁극적인 의미의 물음을 스스로 밝혀야 비로소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서 앞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신이 요구하는 순교자의 죽음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것이다.”(<강제 수용소에서의 집단 심리요법 체험>, 1951). 노인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을 따른다면 보다 좋게 살고 죽기 위한 ‘지혜’ 즉 ‘철학’을 배워야 될 것이다.

현대 일본은 세계 최첨단을 가는 ‘초고령사회(超高齡社會)’, 이른바 ‘노인대국’, ‘노인선진국’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부유하고 넉넉하게 보이는 생활의 뒷면에서 잘 들어나지 않는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노인의 주위에 둘러싸인, 어떤 계기로 누구나 떨어질 수 있는 ‘고독’, ‘고립’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젊은 층에도 점차 확산할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고령자의 경우는 고독사(孤獨死) · 고립사(孤立死)라는 끔찍하고 비참한 사태에 이르기 쉽다. 이 ‘고독’은 인류가 걸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걸어갈 것으로 생각되는 ‘근대’의 업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대란 보통 ‘서양근대’를 의미한다. 서양근대에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경제사회와 자아의 발견이 그것이다. 이 둘에 공통된 정신은 모두 전진과 확대와 경쟁, 합리화와 효율화를 ‘재촉하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남성적 · 약년적(若年的)이다. 완만하게 쇠약해 가는 노인의 세계와는 상반된다. 여기에 현대일본의 노인들이 느끼는 불편함, 살기 힘듦의 근원이 있다.

여기서 요구되고 출현된 근대적 자아, 즉 철두철미 자기에게 의존하는 ‘강한 개인’이란 타자 · 주위와의 관계를 곧 필요로 하지 않고 내면적 자기로 폐색되어가는 ‘아톰적인 자기’(원자화된 개인)일 따름이다. 인간 본래의 ‘상호의존적 자기interdependent self’는 전시대적(前時代的)인 것이 되어버리고 그 연장선상에 현대일본의 고령자들이 직면하고 체험하고 있는 ‘고독’이 출현했다. 최근에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젊은층의 ‘등교거부’, 청장년층에도 파급되어 온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도 이와 같은 ‘근대적’ 세계와 무연일 수 없다.

메이지유신 이래 아시아에서 서양문명을 적극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데에 앞장서고 경제발전을 이룩한 일본을 지금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서양근대 수용 공동체’를 형성하는 한국, 중국이 뒤쫓고 있다. 한중일 3국이 직면하는 고령자문제는 이른바 ‘서양근대’에 필연적으로 내포하게 된 암부(暗部)를 드러내고 있다. 인생 80년보다 더한 ‘인생 100년 시대’에 들어가고 있는 현대세계에서 고령자 문제는 한중일 세 나라뿐만 아니라 현대문명이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노인의 세계는 노동(생활비 획득)이나 육아(성인화 지원)로부터 해방된 세계이다. 청소년기가 현실사회에 직면하면서 자립적으로 ‘강한 개인’으로서 맞서기 위해 “인생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한다면, 노년기에는 의존적이고 약한 ‘약한 개인’임을 자각하고 타자에게 신세지기를 각오하면서 다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생각할 시간이 된다. 노년기에 해야 할 일은 다음 세대의 일자리 · 지위를 빼앗을 수 있는 ‘노동’따위가 아니다. 다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탐구하여 ‘철학’을 공부하고 긴 인생에서 얻은 경험지(經驗知)를 가미하면서 보다 잘 살기 위한 지혜를 닦고 이것을 어떠한 형태로든 사회에 환원해서 장래 세대에 넘겨주는 것, 그리고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것과 조금이나마 보다 나은 사회와 미래를 창조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요구되는 최대의 것이리라. 현대문명이 ‘강한 개인’을 전제로 성립되는 데 대해 노인과 어린이는 타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약한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강함’과 공동보조를 취하는 현대세계가 다양한 모순과 왜곡을 드러내고 있는 오늘날에 요구되고 그것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노인과 어린이에게 공통되는 ‘약한 개인’의 논리, ‘약함’의 철학이다. 거기에는 먼저 노인 개개인이 거듭나야 된다. 자각적으로, 각오를 해서 ‘약한 개인’을 사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어린이들이 아니라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에서 ‘다시 공부하기’ 혹은 ‘다시 살기’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철학이다.

동어반복tautology이 되지만 ‘노년철학’이란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이 일본에서 주재(主宰)한 철학대화인 ‘공공(公共)하는 철학하기’에서 강조된 ‘공공(公共)하다’와 같이 ‘철학하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날마다 저 세상으로 떠날 그날까지 평생 동안 쉬지 않는 공부, 완성을 향해 노력하는 활동을 의미할 것이다.

현대일본의 고령자들의 대부분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사회적, 금전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지금 누리고 있는 생활상의 풍요로움과 편리함, 밝음으로 형성된 사회는 고령자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주는 것인가? 최근에 ‘무연사(無緣死),’ ‘고독사(孤獨死),’ ‘고립사(孤立死)’라는 말을 일본의 TV나 신문, 잡지에서 보지 않는 없는 날이 없다. 특히 홀로 사는 고령자가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이 죽어가는 사례가 두드러지게 증가되고 있다. 2010년 1월에 방영된 NHK스페셜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인 ‘무연사회(無緣社會)—무연사 3만2000명의 충격—’은 인간관계가 엷어지고 가족이나 공동체에서 고립되면서 사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는 현대일본을 ‘무연사회’라는 신조어로 표현했다. “지연, 혈연, 회사의 인간관계가 없어지고 ‘외톨이’가 급증되는 일본, 무연사는 이미 남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젊은 층에도 확산되고 있다.” 프로그램은 큰 반응을 일으켰고 ‘무연사회’는 그 해의 유행어 대상에도 뽑혔다. 옛날과 같은 지연 · 혈연의 붕괴, 사회격차의 진행에 따른 빈곤층의 확대 등이 배경으로 놓여 있는데 충격적이었던 것은 ‘무연사회’ 혹은 ‘무연사’, ‘고독사’의 중심에 있는 것은 틀림없이 고령자들이라는 현실이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2001-06)이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그 뒤의 내각에서 더욱 가속화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규제완화 정책의 추진으로 고용이 불안정한 대량의 비정규 고용(계약사원, 파견사원, 프리터freeter)을 만들어 내고, 현대세계의 경제사회화에 적응할 수 없는 니트(NEET; 독신의 청년무업자)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social withdrawal)의 급증, 생애 미혼율의 급상승 ─20-30대 남성의 30%─ 등이다. 이것을 생각해도 이대로 가면 21세기 일본에서는 고령기의 고독사 · 고립사가 1,000만 명을 넘는 규모에 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고령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독사 · 고립사와 같은 ‘외톨이로 죽는 것’뿐만이 아니다. NHK스페셜은 2014년 9월에 “연금만으로는 못 산다,” “연금생활은 조그마한 계기로 붕괴된다.”고 하면서 ‘노후파산-장수라는 악몽’을 방영했고 이것도 큰 파동을 일으켰다. 너무 긴 노후는 행복은커녕 오히려 이른바 ‘생지옥’이 된다. 건강상태가 악화된 고령자가 자택에서 살 수 없게 되고 자기 집을 쫓겨나다가 병원이나 노인시설을 옮기면서 ‘죽을 곳’을 찾아 표류하게 되는 ‘노인표류사회’(NHK스페셜 2016년 4월에 방영)이 현실의 일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축복된 ‘장수’가 지금은 완전히 모습이 달라지고 말았다.

역대 천황으로는 고대를 제외하면 가장 장수를 누리고 재위기간 64년으로 역사상 가장 길었던 쇼와 천황(昭和天皇)은 서거 2년 전의 85세 때에 자신의 장수를 저주한 바 있다. ‘쿄도통신(共同通信)’이 고바야시 시노부(小林忍) 전 시종(侍從)의 일기를 입수해 2018년 8월에 밝힌 바에 의하면 천황은 고바야시 시종에게 이렇게 토로했다고 한다. “일을 편히 해서 간신히 오래 살아봤자 소용없다. 쓰라린 것을 보고 듣게 되는 것이 많아질 뿐. 형제 등 가까운 친지의 초상이 나고 전쟁책임 이야기를 듣게 된다.”(고바야시 시노부 시종일기, 1987년 4월 7일) 2007년에 밝혀진 전 시종 우라베 료키치(卜部亮吉) 일기에도 천황이 “장수해봤자 변변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는 기술이 있다. 장수가 반드시 행복도 아니고 주위에서 축복받은 것도 아니다. 일본국가의 상징인 천황조차 그 예외가 아니다.

마치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를 금과옥조처럼 여겨 전후(戰後) 일본인은 생활하고 일을 해왔다. 이 말과 더불어 ‘삶의 보람으로서의 노동(일)’이라는 것이 일본인의 기본적인 노동관일 것이다. 전후 일본은 어디까지나 회사 중심의 ‘회사사회’, ‘기업사회’를 형성해왔다.

경제우선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체제의 운영-유지에 기울인 일본사회를 비꼬는 ‘일본주식회사’라는 말이 쓰이기도 했다. 혹은 1970년 전후에 세계에서 세평이 난 일본인=‘이코노믹 애니멀economic animal’이라는 말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동물이라는 국제 회에서의 일본인의 타산적-이기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강렬한 야유였다. ‘회사인간 · 기업전사 · 모레쓰(モーレツ, 맹렬)사원’이라는 말도 한때 유행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고, 기업의 이익에 공헌하고, 회사가 생활의 모든 것인, 스스로와 가정 등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이와 같은 회사 외곬으로 일 이외에 취미 같은 것도 가지지 않는 회사인간을 가리키는 말이 고도경제성장 시기에 특히 많이 사용되었다. ‘회사+가축’에서 온 신조어로 회사에 길들어지고 양심을 포기하고 노예로 변한 샐러리맨을 야유한 ‘사축(社畜)’이라는 말도 유행했다. 최근에는 ‘전인격노동(全人格勞働)’이라는 말이 이들을 대신했다. 미국에서 나온 글로벌 자본주의(시장원리주의 · 경제효율 우선주의) 밑에서 불황 때의 정리해고 추진에 의한 불안감과 성과주의, 장시간 노동과 서비스잔업에 의해 노동자의 전 인생과 전 인격이 ‘노동’에 얽매이고 정신을 앓게 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회사사회’ 노동지상주의의 사회에서는 회사 이외의 영역에서도 회사명과 직함이 중시되고 그것이 일본인이 의지하는 자기 자신과 자존심의 가장 큰 기반이 된다. 일본의 유급휴가 취득률은 세계 최하위 수준에 놓여있다. 유급휴가를 쓰는 것에 대해 많은 일본인이 적지 않은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해지고, 이와 동시에 유급휴가를 쓰는 것으로 ‘일에 대한 의욕이 없는’ 못난 사원으로 평가되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감을 볼 수도 있다. 근대사회의 기본경향은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존재가치를 향하지는 않는다. “어느 대학 · 어느 회사에 들어갔는가?”, “무엇을 이뤘는가?”, “얼마나 출세했는가?”, “얼마 벌었는가?”라는 업적가치의 존중에 있다. 이 세계에서는 업적가치의 인간유형human doing이 항상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존재가치의 인간유형human being을 능가하고 구축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human doing’형 인간의 절망, 거기서의 재생을 그린 것이 극작가인 우치다테 마키코(內館牧子)의 소설 <끝난 사람(終わった人)>(2015)이었다. ‘노동’에서 해방된 회사 정년은 ‘생전 장례식’이 아닐 수 없고, 인간을 ‘끝난 사람’ 즉 ‘사회적 사망자’가 된다. 주인공은 회사에서 ‘유능’하고 ‘유용’하게 보이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에도 가정에도 어디에도 거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게 한다. 『끝난 사람』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폐기된 사람wasted humans’과 거의 같은 것이다. 경제활동에 쓸모가 없는 비생산 인간은 가치가 없는 존재로 사회에서 배제되고 갈 곳 · 거처를 잃게 된다.(<폐기된 삶-모더니티와 그 추방자(廃棄された生─モダニティとその追放者)>, 2004).

한편, 현대일본 고령자의 대부분은 나날의 시간과 긴 노후를 주체 못하여 “오늘은 할 일이 없다.” “오늘은 갈 곳이 없다.” “있을 곳이 없다” 등으로 한탄하는 사람은 결코 적지 않다. 일찍이 유한계급(자본가 · 부유층)의 ‘특권’이었던 ‘한가함’이 현대일본의 고령자들에게는 ‘지옥’으로 변하고 있다. 현대일본에는 수직적인 사회인 ‘회사사회’는 있어도 수평적인 사회 즉 ‘시민사회’가 존재하지도 않고 형성되지도 않았다. 정년퇴임 후 샐러리맨들은 자기 속으로 닫아갈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거친 날씨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름 하나 없는 날의 연속이다.” 스위스의 철학자 · 공법학자인 카를 힐티가 저서 『행복론』 (1891-99)에서 말한 이 말을 ‘한가함’을 주체 못하여 별로 할 일도 없는 일본의 노인들이 절실히 느끼고 있다. 매일 특별히 할 일도 자극도 없고, 마음이 설레는 사건도 완수해야 할 임무도 없다. 강제된 것 같은 공백상태의 ‘무위(無爲)한 나날’이 연속되고 ‘매일이 일요일’의 상태가 된다.

인간은 일상생활에서 나날의 노동, 직업생활, 기타 여러 가지 잡된 일들에게 쫓기고 휘말린다. 세상의 <유용성>이나 <유용가치>적 가치에 구속되고 그 속에 매몰된다. 그것을 풀어주는 것이 ‘생활(인생)의 일요일Sonntag des Lebens’로서의 ‘철학’이라고 헤겔은 1818년 10월, 48세로 염원하던 베를린대학 철학교수에게 초빙됐을 때의 취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학과의 교류는 생활의 일요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일상적인 시민생활 속에서 인간이 유한한 현실 속에 몰두하고 있는 외면적 생활에서 평일에 하는 일, 필요에 재촉된 관심사들―과 인간이 그 일을 놓고, 눈을 지상에서 하늘로 돌리고 저 본질인 영원성, 신성을 의식하는 일요일. 이 두 가지로 시간이 나누어져 있는 것은 가장 훌륭한 제도 중 하나다. 인간은 일주일을 통틀어서 일요일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 평일의 노동을 위해서 일요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베를린대학에서 철학교관에이 됨에 즈음한 고사告辭>).

헤겔은 말한다. 인간 이성은 스스로의 존재를 위해서 “보다 널찍하고 다종다양한 현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보다 긴요한 것은 “정신이 현실의 유한성 속에 잠겨 가라앉힌 채로 있지 않는 것”이다. 오직 현실의 유한성에서만 얽매여서 살아서는 안 된다. 하늘을 우러러봐라. “눈을 지상에서 하늘로 돌리고, 저 본질인 영원성, 신성을 의식”해야 된다. 헤겔이 학생들을 향해 이야기한 것은 인간이 “유한한 현실 속에 몰두”하는 존재에서 “눈을 천상(天上)으로 돌리는” 존재자로 전환되기를 요청한 것이다.

이 말이 어울린 것은 오히려 매일이 ‘허무한 일요일’인 일본의 고령자들일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상에 대한 관심을 겨우 절반 정도로 하고, 나머지 절반은 눈을 하늘로 돌리고 영원한 대우주를 생각하는 것, 즉 지상적 가치를 뛰어넘은 것에 대한 사색이 요청된다. 카를 뢰비트(도호쿠대학東北大學에서도 가르친 적이 있는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제자, 1897-1973)은 인간 최고의 영위로서의 철학의 필요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존재하는 것 전체에 관한 최고의 지식으로서의 철학은 그 눈길을 별 하늘의 천계(天界)―철학의 임무는 이 눈으로 보이는 세계가 숨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지만―로 향하는 것으로 지상과 지상적인 모든 것과 인간에게 가장 밀접한 환경세계를 초월하는 것이다.”(<세계와 인간사회> 1960)

헤겔이나 뢰비트가 말하는 “하늘을 우러러 봐라”라는 요청은 2500년 전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말한 ‘하늘의 관조(觀照; 테오리아theoria)’ 이래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이 지상의 생물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인간이다. 자연이나 신이 우리 인간을 낳은 목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피타고라스(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는 늘 ‘하늘을 관조(테오리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아낙사고라스(위와 같음)도 또한 사람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태어나고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하늘을 관조하고 그 속의 별들, 달, 해를 관찰하기 위함이다.”(기타의 모든 일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의미로)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에 따르면 사람은 모두 인식하고 관조하기 위해 신에게 만들어진 것이다. 관조하는 행동은, 무엇보다 기쁨에 가득 찬 것이어야 된다.─(철학의 권유Protrepticus).

그들이 말한 ‘하늘’은 옛날부터 영원성이나 초월성, 고귀성, 무한불변의 절대적 실재라는 신성(神性) · 성성(聖性)을 띠고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루마니아의 종교학자인 미르체아 엘리아데에 의하면 천공에 대한 신앙은 현실생활에 쫓기는 가운데에서 신앙심이 평소의 생활과 밀접하게 결부된 ‘일상적인 필요를 지배하고 있는 힘’으로 눈을 돌리게 되어 간다고 한다. “생활의 힘듦은 하무래도 천상보다 지상 쪽으로 눈을 돌리게 하고, 그리고 천공의 중요성을 알아보게 되는 것은 죽음이 하늘에서 인간을 위협할 때가 오고 나서부터이다.(<태양과 천공신>, 1974). 천공을 우러러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지상만 바라보며 ‘회사’교의 신자가 되고, ‘일’신만을 신앙해온 전후의 일본인은 “죽음이 하늘에서 인간을 위협할 때가 오고 나서”도 오로지 지상을 바라보는 것밖에 못하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하늘에 눈을 돌리는 것을 잊어버렸다. ─여기에 우리들 현대일본인의, 특히 그랬어야 할 노인의 큰 불행이 있다. 우리 현대 본인의 인생과 생활에는 헤겔이 말하는 ‘일요일’이 없다.

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철학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부로서의 철학임과 동시에 실천적인 행동의 이론, 행동 그 자체이어야 된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철이 들은 그 날로부터 불가불 현실세계와 맞서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는 끊임없는 도전이 있어 혹은 성공해서 기뻐하고 실패해서 맥이 빠지며, 환희하고 고뇌하며, 혹은 할 일 없이 공허한 나날이 연속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 시선이 항상 수평 방향으로 향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상적인 것을 바라볼 뿐, ‘천공’을 향하지는 않는다. 영원무궁한 것으로서의 ‘하늘’은 아득히 상공의 높이에서 인간들의 영위를 비정하고 무심히 내려다볼 뿐이다.

노인의 세계는 노동(생산 · 경제활동)이나 육아(감호 교육 의무)로부터 해방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상적인, 수평 차원의 인과율(성공/실패, 행운/불행)의 질곡으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하다. 늙어서 ‘철학하기’란 눈앞에 드러난 세계나 과거 · 미래라는 국지적이고 일방향적(一方向的)인 수평적 인과의 축에 묶인 눈을 상공으로 돌리고 영원한 것/ 무궁한 것으로서 머리위에 펼쳐 있는 ‘하늘’을 우러러보는 데에 있다.

지상적인 인과와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자재무애(自在無碍)한 존재자로서 마음을 수직 방향의 저 멀리 ‘하늘’로 던지는 것을 공자는 “70세가 돼서야 마음대로 해도 바라는 바가 법도를 어긋나지 않게 된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도파(道破)했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좇을 종(從)’은 ‘늘어질 종(縱)’과 통한다. ‘종(縱)’은 수직 방향의 ‘세로 종’이자 ‘방종할 종’이며 그것은 천공을 향하고 지상으로 열리는 명랑한 방념(放念)을 의미한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라고 끊임없이 ‘철학하는’ 것. 이렇게 함으로써 늙은 인간은 표연(飄然)하면서 우아(優雅)하고 명랑한 방념 속에서 항상 타자와 천지와 함께하면서 천천히, 영원한 것으로서 스스로를 여는 존재자에게 향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년철학’이 목표로 하는 이상의 경지가 아닐까? 늙어서 ‘철학하는’ 것을 통해 수평 차원의 인과율에 고착된 현실사회의 ‘작은 세계’, ‘작은 이야기’를 넘어서 보다 열린 ‘큰 세계’, ‘큰 이야기’를 자식이나 손자, 장래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가리켜줄 수 있을 때, 그것이 비록 지극히 조그마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의 완결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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