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1894∼1938) 선생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기 위한 8회 ‘포석 조명희 학술 심포지엄’이 지난 10일 오후 4시 진천 포석 조명희 문학관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김성수 성균관대 교수는 ‘조명희와 조벽암-조명희의 복권과 북한에서의 조벽암’을 주제로 발제했다. 이어 김승환 충북대 교수를 좌장으로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국장, 김주희(침례신학대 교수) 문학평론가, 정연승(소설가) 충북작가회의회장, 한성숙(소설가) 충북도립대학 외래강사가 참여하는 토론이 펼쳐졌다. 이날 심포지엄의 내용을 싣는다. <편집자>

 

김성수 성균관대교수
김성수 성균관대교수

 

● ‘조명희와 조벽암-조명희의 복권과 북한에서의 조벽암’

오늘 제 발표는 일제 강점기 리얼리즘 민중문학의 대표이자 '재러한인 디아스포라문학'의 선구자였던 포석 조명희(抱石 趙明熙, 1892~1938)가 남북한에서 한때 잊혀졌다가 어떻게 복권되었는지 개관하고, 북에서 조명희 존재를 알리는 데 공이 큰 벽암 조중흡(碧岩 趙重洽, 1908~1985)의 역할과 그의 문학을 추적하는 것입니다. 포석에 대한 연구와 기념사업은 워낙 잘 되어 있기에, 이번 기회에 그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 받은 조벽암의 월북 후 행적과 문학세계를 개관하려고 합니다. 이는 포석 조명희든 벽암 조중흡이든 남북의 이념적 잣대로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말고 언젠가 쓰여질 ‘통일된 민족 문학사’의 기초를 다지자는 의도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한겨레 문학·문화사’의 일부로 월북 작가와 디아스포라 문학 전체를 복원, 복권시킬 때 상징적인 존재임을 제안할 생각입니다.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소수민족 압제정책의 희생양으로 선생이 1938년 5월 11일 총살당한 후 러시아에서는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의 해빙정책에 따라 1956년 7월 20일 소련 극동주 군법재판소의 결정으로 복권됐습니다. 북한에서는 선생의 조카 조벽암과 엄호석 등의 노력으로 1956년 그의 러시아 망명 후 행적과 문학이 복원되었고, 우리 한국에서는 1988년 ‘월북 작가 해금조치’로 복권됐습니다. 100년 전 일제는 3.1운동 후 표면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했으나 폭압적인 식민지 침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계몽기문학을 넘어선 신문학운동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영웅주의적 문학사관의 폐해가 반영된 낡은 명명법인 이른바 ‘2인문단시대’로 불렸던 1910년대 이광수, 최남선의 ‘청춘, 소년’ 잡지 시대와, 1920년대 초의 김동인, 염상섭, 박종화 등 ‘창조, 폐허, 백조’ 동인지로 대표되던 이른바 따옴표 ‘동인지 문단시대’가 종막을 고하고 문학사 주류가 급격하게 교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24년 ‘백조’파의 와해와 함께 등장한 김기진, 박영희 등 새로운 비판적 지식인에 의해서 신경향파, 민중문학이 자리를 잡게 됐습니다. 이들은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민중의 계급적 자각과 사회적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문학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기치 아래 김기진, 박영희, 송영, 조명희, 이기영, 한설야 등은 최초의 근대적인 문인조직인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를 중심으로 프롤레타리아문학을 펼쳐나갔습니다. 1926년 11월 사회변혁운동 각 부문에서 방향전환론이 전개되어 문화예술 부문에서도 목적의식론이 나왔습니다. 과거의 범범한 민중 중시 정도에서 벗어나 단합된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투쟁을 고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조명희의 <낙동강>이 목적의식적 방향전환의 징표가 되는 대표작으로 떠올라 찬반 논란이 되면서 조명희는 문단의 총아가 됐습니다. 포석은 진천의 가난한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신문학운동을 하다가 프로문학예술운동의 길로 좌경화되어 일제 탄압을 받게 되자 러시아로 망명한 시인이자 극작가요 소설가입니다. 게다가 사회운동가이며 교사이자 언론인이고 재소(在蘇. 러시아, 우즈벡, 카자크를 포함한 옛 소비에트연방 거주) 한인 커뮤니티의 정신적 지도자였습니다. 조명희의 생애를 재구성할 때 월북 작가인 이기영, 한설야의 회상도 큰 몫을 차지하지만, 또한 그의 조카인 월북 시인 조벽암도 적잖은 삼촌 회상기를 남겨 도움이 됩니다. 벽암이 기억하는 포석의 사상 전환 - 시인 극작가 연극운동가의 문청에서 소설가 사회변혁활동가로의 변신 -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성격은 그로 하여금 한끝에서 다른 끝으로 돌진하게 하였다. 그의 문학 경로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바로 그는 ‘타골류의 신랑만주의’에서 ‘고리끼류의 사실주의’에로 전환을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전환과정에는 아주 심각한 자체투쟁이 있었다. 사려가 깊은 포석은 남의 기분에 들뜨는 사람이 아니였다. 우선 ‘고리끼류의 사실주의’에로 전환할 때도 그러했는데 그는 그것을 심각히 캐여보는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런 때면 그는 무서울 정도로 독서에 열중한다. 언젠가 민촌 리기영 동지가 그에 대한 회상기에서 쓴 바와 같이 ‘도서관에서 항시 만나는 사람’이 바로 포석인 것이다.”

1927년 7월 대표작 <낙동강>을 발표함으로써, 이전까지 자연발생적 수준에 머물던 ‘신경향파’문학에서 목적의식적 ‘제2기’문학으로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의 방향을 한 단계 진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즉, 이전처럼 ‘살인, 방화’의 자연주의적 기록주의적 형상이 아니라 사회운동가 박성운의 비극적인 죽음과 애인 로사의 북행을 통해 조직적 투쟁 프로그램을 보여줌으로써, 한 단계 진전된 리얼리즘미학 수준을 보인 것입니다. ‘조직 투쟁’이라는 목적의식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문화 보급, 교육사업, 귀농, 야학, 소작쟁의 등 투사의 변화괴정을 대표 전형으로 진실하게 그려냈습니다. 카프 초창기 문예 기관지가 <문예운동>(1926)이었고 그것이 검열 삭제로 누더기가 된 후 폐간되자 다음으로 나온 기관지가 <예술운동>입니다. 여기에 조명희의 서사시 ‘땅’이 실리기로 예정되었으나 일제의 폭압적 검열과 탄압으로 말미암아 만신창이 검열 삭제 끝에 결국 한 페이지도 발표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한 조벽암의 기억도 선명합니다.

“당시 프롤레타리아예술운동잡지 예술운동 창간호에 실린 그의 서사시 땅은 일제의 폭압으로 인하여 만신창이 되어 겨우 한 페지도 발표되지 못했다. 그 서사지의 원고를 내가 필사해주었는데 그 때 기억을 더듬으면 그 서사시는 400자 원고지로 150여 매나 되었었다. 그런데 일제의 검열을 받은 후의 형편은 겨우 3~4매의 원고지를 제외한 나머지 전 원고지 우에서 전문삭제의 험악한 검열도장이 찍혀있었다. 그 서사시는 그 당시 비참한 농민생활과 그 생활에서 벗어나려는 농민들의 투쟁을 형상화한 것이 였는데 그 원고가 해방 후까지 내게 보관되여 있었다.”

문제는 조명희의 생애 전반기 대표작이 되었을지도 모를 서사시 땅이 아예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훗날 유작인 서사시 ‘만주 빨치산’이 갑작스런 체포-투옥-처형으로 사라져버린 사실을 떠올리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명희는 초기 프로문학이 신경향파적 단계에서 목적의식적 단계로 발전하는 리얼리즘문학의 개척자이자 사회주의리얼리즘문학으로의 도약을 꾀한 진보적 작가로 문학사적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조명희가 우리 문학사에서 또한 중요한 점은 1928년, 일제의 박해를 피해 러시아(옛 소련)로 망명하여 러시아 내 한국인(이들은 고려인 또는 ‘재소한인 在蘇韓人’이라 불렸다)들의 문학을 새롭게 건설하는 데 앞장선 사실입니다. 한겨레 디아스포라(이산)문학/문화의 상징적 존재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는 러시아 연해주 니콜스크 등지의 ‘조선인 육성촌’에 정착하여 교사로 일하면서 황명희(마리아)와 결혼했습니다. 조명희는 1938년에 사망했습니다. 후일의 선집을 보면 심지어 사망 일자도 잘못기록돼 있지만 흐루시초프의 해빙정책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 이후 옛 소련이 무너지고 재소한인 사회에서 그의 명성이 재평가되면서 그의 행적이 속속 드러났습니다. 특히 그의 장녀 조선아(조 왈렌찌나 명희예브나)의 노력에 의해서 그의 최후가 소상히 밝혀질 수 있었습니다. 조선아에 따르면 조명희는 간첩죄로 총살당했습니다. 일본을 위한 간첩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협력한 죄로 형법 제58조에 따라 취조와 재판 없이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8년 4월 15일 처형이 결정되고 9월에 하바로프스크 형무소에서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체포 경찰에 끼어있던 재소한인의 모략할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독재자 스탈린의 전국 농장 꼴호즈(집단농장) 강행과 그 노동력 투입을 위한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과 관련됐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러시아의 재소한인 커뮤니티의 정신적 지도자를 오명을 씌워 제거하여 강제 이주 및 강제 노동 정책에 대한 집단반발을 억누르는 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해석됩니다. 북한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 당시로선 행방불명 실종자 신분이었을 조명희와 그의 문학, 특히 대표작인 단편소설 ‘낙동강’을 국어 교과서에 실을 정도로 처음부터 높이 평가했습니다. 1946년 초부터 일찌감치 정전화됐습니다. 정전이란 학계, 문단, 문화계, 교육당국에서 그 사회가 모범으로 본받을 만한 대표작, 수작, 명작으로 판단하여, 공식 문학사와 문학작품집, 그리고 교과서에 게재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북한에서 조명희와 <낙동강>의 위상을 알 수 있는 간접적 추억은 월남작가 최인훈 대표 장편소설 <화두.(1994)에도 회상되었을 정도로 인상이 강렬합니다. 1928년 이후 행불자 신분이던 조명희의 러시아 연해주 망명 이후 실제 행적은 1956년에서야 확인됐습니다. 1956년 소련작가동맹원이었던 고인의 처남 황동민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던 것이다. 북한에서 조명희가 재조명된 것은 1956년 9월이다. 조명희의 처남 황동민과 제자들이 오랫동안 수집했던 조명희의 유고 등 자료를 수집해왔는데, 1959년 조명희 선집을 발간하기 전에 원고 중 일부를 방러 조선작가동맹원에게 제공하여 이들 중 일부가 북한에 먼저 소개된 것입니다. 이들 원고를 읽고 북한 평론가 엄호석, 김재하가 저서와 논문, 평론을 쓰고 작가동맹 기관지 <조선문학>에 망명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 시 몇 편을 몇 차례에 나눠 소개하였다. 제가 이번에 주목한 것은 북한에서 조명희를 재조명한 1956년의 문단 중심이 당시 문단권력인 조벽암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입니다. 나아가 월북 시인 조벽암의 이북에서의 생애와 문학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벽암은 어릴 적부터 삼촌 포석의 문학적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조선문학> 주필인 조벽암은 삼촌인 조명희의 유작을 자신이 주재하는 대표 문예지에 몇 차례에 걸쳐 소개했습니다. <조선문학> 1957년 1월호와 1958년 10월호에 조명희의 러시아 망명 후의 시를 10편 가까이 게재하고, 1962년 7월호에는 그를 기리는 회상기를 썼습니다. 조벽암은 이런 식으로 조명희의 과거 행적과 러시아 망명 후 행적 및 문학작품을 반복적으로 소개하여 그의 근대문학사적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조벽암은 원래 ‘카프’ 동반자 작가이자 시인이었지만 8.15해방 후 서울에서 1945년 '건설출판사'를 설립한 출판인이기도 합니다. 좌파 매체인 주보 <건설>, <예술> 잡지 및 조명희의 <락동강>, <정지용시집> 등을 출간해 문예 출판에도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카프 활동 경력과 건설출판사의 좌익 출판물 탓에 미군정청에서 조벽암을 가만둘 리 없었습니다. 좌익단체에 대한 첫 대검거시기에 미군정이 그를 테러분자로 몰아 출판사를 파괴하고 몰수했습니다. 1949년 여름에 미군정의 정치 탄압을 피해 북으로 망명한 그가 쓴 첫 작품은 ‘남조선무장유격대’의 투쟁을 취급한 서정서사시 ‘진격의 날’인데, 북문예총 기관지 <문화전선>에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정전 후인 1954년 1월부터 현역작가로 창작활동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현지파견’ 이름으로 하방됐습니다. 1956년 5월에 작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으로 문단에 복귀한 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월간 <조선문학>지와 주간 <문학신문> 주필과 평양문학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조벽암이 삼촌인 조명희의 소련 망명 후 행적을 ‘복원’한 것입니다. 당시 문예지 조선문학 편집 주체인 조벽임 주필의 역할도 물론 한 몫 했습니다. 같은 문예지라 하더라도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우리와는 달리 당(黨)문학론을 표방한 북한에서 김일성 이외의 특정 작가가 대접받는 경우는 한설야, 이기영 등 극소수 문단권력뿐입니다. 작가동맹 기관지임에도 당 정책을 대중에게 배포하는 선전지적 편향이 강할 때가 있고 문학지적 지향을 견지할 때가 있다. 조선문학도 당 문예 기관지니까 당연히 상급 기관의 정책 전달과 선전을 주기능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문화전선처럼 아예 노골적인 정책 선전지를 표방하고 비문학 정론 등 선전물과 조직 결정서를 잡지 전면에 전재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준거로 볼 때 조명희 문학이 재조명된 것은 마침 1956년 제2차 작가대회의 도식주의 비판과 예술의 특수성 강조 분위기에 조선문학이 편승한 덕도 보았습니다. 게다가 조선문학 주필 엄호석이 매체 성격을 선전지와 문학지의 균형을 맞추려 애썼던 조명희 연구자였고, 주필직을 이어받은 조벽암(1956.11~1958.5) 또한 ‘도식주의 비판’ 명분으로 리얼리즘을 풍부하게 활성화 시킨 일환으로 조명희를 소환한 것입니다. 카프 중심의 월북 작가들이 북한문학의 모태이며 그들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이 북한문학의 모태로 여겨졌던 1950년대에는 ‘조명희가 기원 상징’으로 중요시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은 1988년 7.19 해금조치로, 1951년 이후 월북 작가로 오해되었던 조명희, 조벽암이 ‘금지’에서 풀려나 학자들과 독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납·월북 작가 해금’조치는 분단 후 암암리에 작품 유통 심지어 거론 자체가 금기시했던 납·월북 작가 120여 명을 해금한 것입니다. 정한모 문공부 장관이 발표한 1988년 7.19조치는 88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는 데 필요한 국제사회의 공조와 문화적 포용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노태우 6공 정권의 북방정책과 맞물려 단행됐습니다. 정부 수립 후 40년 동안 공식·비공식적으로 금지·금제되었던 납·월북 문인들의 ‘해방 전 순수’ 문학작품에 대한 문학적 복권과 동시에 상업 출판이 합법화된 것인데 엄밀하게 말해서 그 전에 1987년 9월, 월북 작가 ‘연구’가 학자들에게 우선 허용된 것입니다. 그후 조명희와 그의 문학을 복원 복권하는 수많은 연구와 작품집 발간, 기념행사가 계속되어 이제는 한국 근대 작가 예술인 중 꽤 손꼽히는 수준의 최고 기념사업회와 문학관을 세우기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 한국에서의 조명희 복권은 관련 학계와 후손, 진천을 비롯한 지역사회에서는 완결되었지만 일반인 독자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충북을 넘어선 전국구-한반도-유라시아 보편 지역성을 아직까지 만족스럽게 획득하지 못한 점입니다. 앞으로 학자들만 보는 한국문학사 차원을 넘어서 한국문학전집과 교과서(문학교육) 등까지 조명희 존재가 복권되고, 시와 소설이 복원되어 널리 알려져야 할 텐데, 그런 정도의 정전화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납·월북 작가·예술인들은 암암리에 거론 자체, 존재 자체가 금기시됐습니다. 한창 전쟁 중이던 1951년 공보처에서 ‘월북 작가 작품 판매 및 문필활동 금지 방침’을 내면서 월북 작가를 ‘6.25사변 전 월북자 A급, 사변 이후 월북자 B급, 사변 중 납치, 행불자로 내용 검토 중 C급’으로 분류, 제재하기 시작하여 1957년 월북 작가 작품의 전면적인 출판· 판매 금지됐고, 한때 국가보안법, 반공법에 근거하여 반역자로 몰렸고 심지어 후손들에게까지 연좌제가 적용되었던 월북 작가의 존재는 금지 영역에 속해 오랫동안 비밀에 붙여졌습니다. 한반도 남북 통일이나 전 세계 한겨레 디아스포라의 문화적 정서적 통합을 위해서 앞으로 신원(伸冤), 해원(解冤)을 해야 할 존재이기도 합니다. 한편, ‘납·월북 작가 예술가 해금’조치 또한 아쉬움 점이 없지 않습니다. 관련 전공자의 충분한 사전 검토나 학술적 여과장치가 부족한 채 공안당국의 시혜적 조치로 88 올림픽과 연계하여 해금이 단행되는 바람에 납북과 월북, 무엇보다도 재북(在北‘, 歸北’ 포함) 개념이 간과, 무시됐습니다. 심지어 포석 조명희 같은 경우는 정보 부족으로 오해받아 심지어 해금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공 학자나 자손이 아닌 일반인들은 조명희와 그의 조카 조벽암을 월북 작가로만 알고 있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 개방화된 1988년 이후 한 세대 30년이 지나면서 학계에선 이들의 존재가 거의 대부분 복원·복권됐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엄존해 있는 강고한 반공·반북 이데올로기 때문에 이들 중 소수만 교육과정, 문학선집·문학사 등의 정전에 편입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입니다. 해방 전 순수문학만 정전화돼 정작 근현대문학사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카프와 조선문학가동맹 출신의 문학은 정전에 온전하게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납북·재북·월북·월남’ 작가의 존재와 그들의 작품에 대한 실증적 서지작업부터 시작하여 우선 분단 이전 문학을 온전하게 복원해야 합니다. 나아가 분단 이후 북한에서 숙청된 재·월북 작가 복권·문학 복원도 필요합니다. 북한문학의 경우 분단 이후 숙청된 월북·재북·월남 작가와 그들의 ‘非주체문예(개인숭배적 주체사상에 기초한 문학예술에 동조하지 않은 사회주의 리얼리스트)’ 리얼리즘 문학의 복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980년대 말 한때 우리 사회가 좌경화되었을 때 과포장된 북한 문화콘텐츠와 월북 작가 예술가들의 생애와 창작에 대한 과잉 기대와 과대평가가 반성됩니다. 그들의 문학적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그에 따른 해금 절차와 속도(1978~88)보다 더 빨리 우리 한국의 독서시장에서 쇠퇴, 소멸했습니다. 다만 독서시장과 출판자본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학계, 공공도서관은 1987~95년 속출했던 월북 작가의 월북 작품과 북한 문건, 특히 문학서적 수집과 체계적인 자료 정리(아카이빙)를 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의 복원은 국립도서관, 북한자료센터, 통일연구원, 대학 등의 공공기관과 학계의 몫입니다. 앞으로 쓰여질 한겨레 문화사의 한 부분으로 남북의 문학사를 병행적으로 서술할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나아가 이질적인 북한문학, 북한예술도 겨레의 창조적 다양성의 포용과 통합이란 관점에서 소통,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 문명사를 거시적으로 봤을 때 지난 70년 분단기 동안 남북한은 문화적으로 사상적으로 침체기였습니다. 때문에 2019년 현 시점에서 우리 학계가 진정으로 분단·냉전체제를 극복·지양하고 평화체제로 나아가려면 ‘납·월북 작가 해금’조치란 개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보는 인식의 프레임 전환이 필요합니다. 월북한 벽암이 남에 두고온 가족들과 챙겨오지 못한 작품들, 원고를 안타까워하며 중세 문인들처럼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문집’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저는 월북작가라고 그들의 작품까지 모두 빗장을 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포석 선생처럼 월북작가로 오해받거나,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납북, 월북한 경우도 있습니다. 북한에 간 그들이 모두 체제를 선전하는 작품만 쓴 것은 아닙니다. 반공한 사람들도 있고, 뛰어난 문학 작품을 남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월북작가라는 프레임에 갇혀 복원되지 않은 채 지워진 작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월남이든 월북이든 일종의 분단 피해자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제 작품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남북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통일문학 구성에 나서야 합니다. 우리의 문학작품을 모두 모아 한겨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라는 허브로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문단, 학계, 혈연(후손), 학연(인맥), 지연(지자체) 등 비문학적 학문외적 근거나 인연(정실) 아닌 문학적 학문적 준거만으로 월북 작가, 예술인, 지식인, 정치가, 독립운동가 등에 대한 연구와 출판이 이루어졌을까, 과거에 있었던 사실 확인만을 통해 공훈 추서/반민족 행위 규정이 과연 정당하게 이루어졌을까하는 점입니다. 학자, 문인, 예술가, 문예미디어, 출판사, 지자체와 후손이 주도하는 각종 문학제와 문학상에도 ‘해당사항 없음’인 무명 월북/월남자들도 복원, 복권, 신원이 필요합니다. 정치적 경제적 피난처로 상대 체제, 다른 나라를 택한 남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중앙아시아 등 지구 전체의 이산(離散, 디아스포라) 한겨레를 문화정치적 난민으로 재규정하여 그들 모두를 복권, 나아가 신원(伸冤), 해원(解冤)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선진국, 포용국가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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