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동양일보) 요즘 집안의 아기가 즐겨 쓰는 대화체가 중독성이 있는지 입에 붙는다.

주인공은 조카의 딸로 이제 세 돌이 채 안된 아기인데, 꼭 누가 가르쳐 준 것처럼 말을 해서 주위 사람들이 재미있어 한다.

이 아이가 하는 말은 제가 듣고 싶은 말을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 가령 어린이집에서 칭찬을 받고 싶으면 “선생님, ‘민아가 친구에게 양보를 해서 하느님이 기뻐하시겠네’ 이렇게 말해 주세요.”라든가, “선생님, ‘볶은 김치가 민아 입으로 쏘옥 들어가고 싶어 하네’ 이렇게 말해주세요.”한 뒤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집에서도 “엄마, ‘민아에게 키즈카페에 갈까?’이렇게 말해 주세요”라고 한 뒤 키즈카페를 가자고 하고, “짜장면 먹을까?”말해 달라고 한 뒤 짜장면을 먹자고 조른다. 하고 싶은 것이나 듣고 싶은 말 등 자신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상대방을 통해 듣고 표출하고 해소하는 이런 방법을 이 아이는 어떻게 터득한 것일까.

매년 소비트렌드를 조사해 발표하는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 2019’에서 올해 소비트렌드로 ‘감정대리인’을 내세웠다. 디지털 환경의 발달로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

‘감정대리인’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자신의 감정을 대신해주는 매체를 말한다. 디지털 기기를 많이 사용하는 현대인들은 직접 대면 관계에서 관계 맺음이 쉽지 않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보니 감정을 털어놓을 곳도 마땅치 않다. 그래서 대신 감정을 표현해줄 수 있는 매체를 찾게 되는데, 사람뿐 아니라 상품 등 관련 서비스를 총칭해서 감정대리인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SNS상의 이모티콘으로 국내 이모티콘 시장은 연간 1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인기를 끌고 있는 관찰형 예능 프로그램들도 감정대리인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미운 우리 새끼’는 어머니들을 패널로 내세워, 그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역정을 내는 모습에 공감하며 감정을 대리 표출한다.

‘액자형 관찰예능’도 감정대리인의 노릇을 충실히 한다. ‘나혼자 산다’나 ‘한국은 처음이지?’같은 프로그램처럼 출연진들의 일상생활을 시청자가 지켜보고 관찰하는데, 그 모습을 관찰하는 또 다른 패널들이 있다. 그리고 시청자는 그 패널들의 이야기를 또 관찰한다. 마치 액자 속의 그림을 보듯 관찰의 관찰을 더하는 것.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공감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감정대리인’이다.

‘감정대리인’의 갈래 중에는 ‘감정대행인’도 있다. 유튜브에서 200만 뷰가 넘는 ‘명품 하울’이라는 동영상은 대량의 명품을 매장에서 쓸어 담듯이 가지고 와서 하나씩 개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영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사지 못하는 물건을 대신 사서 풀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 일종의 감정 대리만족, 감정대행이다.

또 ‘감정대변인’도 있다. ‘감정대변인’이란 자신의 감정을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고, ‘나 오늘 우울’ ‘짜증남’ 식의 글귀를 프로필 사진에 붙이는 식의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현대인들이 감정대리인을 찾고 소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비대면 문화의 발달로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유지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해진 탓이다. 관계를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관계가 없어서 외로움을 느끼고 싶지도 않고, 그러다보니 감정대리인을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갈수록 감정의 인식과 감정의 표현이 서툴러지는 세상이다. 그런데 어쩌면 아직 세상을 모르는 세 살배기 아기까지 자신의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언어기법을 배우게 된 것일까.

아기의 하는 짓과 말투가 귀여우면서도, 이 아이가 자라서 감정표현으로 상처를 받을까 미리 걱정이 든다. 부디 우리 사회가 내 마음을 남에게 부탁하지 않는 성숙한 사회가 되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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