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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시마자키 순직비’가 ‘청암 항일의거비’밑에 있는 이유
풍향계/ ‘시마자키 순직비’가 ‘청암 항일의거비’밑에 있는 이유
  • 동양일보
  • 승인 2019.05.20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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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청암 한봉수 의병장은 청주시 북일면 세교리에서 태어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사냥을 다녔는데, 17살이 되자 인동에서 명사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대한제국군은 대한제국 선포와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군을 개편하며 이루어진 군대이다. 황제가 최고 사령관이었다. 친위대, 시위대, 진위대로 나누고 육군과 해군 두 개의 군종으로 편제한 모병제였다.

호기가 담대했던 그는 대한제국군 진위대에 뽑혀 상등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지방군인 진위대는 4,305명 수준이었고 군대해산 후, 일부는 황제의 호위병 등으로 남고 대부분은 해산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청암은 군대가 강제 해산되어 실망하던 중, 의병장 김규환을 만나 의병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고향을 중심으로 1907년 가을 해산된 군인을 규합하여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의병대장이 된다. 그리고 옥성리 사건을 시작으로 초정리에서는 강원도에서 수송되는 세금고(稅金庫)를 습격, 77만원을 탈취해 독립자금으로 확보하였고, 세교리에서 왜헌병 12명을 사살하고 옥화대에서 단신으로 외헌 8명을 사살하여 무적장군 소리를 듣게 되었다. 괴산 유목리, 낭성 가래올, 전의, 목천, 평택, 장호원, 횡성 등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4년 6개월 동안 33전 32승 1패의 전과를 기록한다. 그는 행동이 너무 빨라 '번개대장'으로 불린 유격전의 명장이었다. 1909년 문경새재에서 적군 40여 명의 정예부대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수의 열세에 밀려 장졸을 이끌고 속리산으로 피신하였다. 이것이 의병의 마지막 전투가 되고 말았다.

특히 진천에서 일본군 헌병 중위 시마자키를 비롯한 3명을 사살하는데, 의병생활 초기에 6~7명의 의병이 게릴라전을 펼쳐 거둔 전과였다. 지금도 옥성리에 가면, ‘의병장 청주한공봉수 항일의거비’ 발치에서 시마자키의 초라한 순직비를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이 순직비를 분쇄해 버리자는 의견을 접고, 청암 한봉수 의거비 발치로 끌어내림으로써 일제침탈을 단죄한 의병활동의 충절을 찾는 이의 마음속에 강렬하게 각인시킬 수 있게 되었다.

점차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한계에 달하게 되어 청암은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상하이로 망명할 계획을 숨긴 채, 1910년 5월 12일 귀순 의사를 밝힌 뒤 서울 마포에 있는 처가에 피신해 있다가, 5월 15일 남대문 역에서 충청북도 경찰부 소속 일본 순사에 의해 체포되었다. 1910년 6월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내란죄 및 강도·살인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중 같은 해 8월 소위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청암 한봉수 의병장은 1883년 4월 18일 청주시 북일면 세교리에서 태어났으며, 의암 손병희 선생은 1861년 4월 8일 북이면 금암리에서 태어났으니 두 분의 나이는 22살의 턱이 있다. 의병장은 평소 성격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했던 손병희 선생을 존경하였다.

3·1운동이 가까워지자 두 분의 주고받는 연락 횟수가 많아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의병장이 상경하여 보성사를 찾았다. 이 인쇄소는 경향 각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모여들고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청암이 나고 자란 세교리는 상당산성을 돌아 미원을 갈 수 있고 청주에서 괴산을 가거나 진천을 갈 때 꼭 거쳐야하는 길목이었다. 드디어 3월 7일 세교리에서 근거리에 서는 청주 장날이 찾아왔다. 의병장은 장터 입구에 마차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군중을 행해 살포하며 청주장터에 모였던 장꾼들의 입에서도 독립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또한 4월 1일에는 세교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고, 내수보통학교 학생들과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6일 공주 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청주시 내덕동에서 청빈하게 살다가 1972년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그런데 청암에게 누가 친일파라고 얼빠진 소리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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