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겸 청주시 청원보건소 영하보건진료소

(동양일보) 비가 내린다. 약간은 스산하게 찬 날씨다. 오랜만에 작정하고 준비해 헌혈을 하러 가는 길이다. 지난해에는 건강검진 중 수면 내시경을 한 탓에 마취제 투여 한 달 이내라 헌혈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하지 못했다. 언젠가 헌혈을 하는데 간호사로부터 헤모글로빈 수치가 무척 좋으니 건강이 허락한다면 자주 방문해 달라는 말을 듣고는 정말 사명감을 가지고 꼭 해야지 결심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미리 날짜까지 잡아 놓고 아침 든든히 먹고 헌혈의 집에 도착했다. 굵은 혈관을 찾아 주삿바늘이 들어갈 때 따끔하고는 불편함 없이 잘 마칠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초코파이와 주스를 실컷 먹고 감사 선물로 영화 티켓까지 얻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쉬고 있노라니 오래전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출근 준비를 하는데 어질어질했다. 화장실을 나오다가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간신히 몸을 추슬러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근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통증이 어깨까지 퍼지고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구역질이 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119에 전화를 했다.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구급차에 타는 순간 안도감이 들었는지 의식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병원이었고 팔에 링거가 꽂혀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도 심한 어지럼증에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것이 회전목마를 탄 기분이었다. 몸을 전혀 가눌 수 없는 상황에서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간호사는 저혈압으로 쇼크 직전이라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난 화장실을 가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안 된다고 하는 간호사 소리를 들으며 또 실신을 하고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혈액액주머니가 매달려 있다. 이런저런 검사를 해본 결과 자궁 외 임신으로 복강 출혈이 심해 수혈하며 응급수술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둘째 아이를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이런 일이 생기다니, 마취가 풀리면서 상처의 아픔과 마음의 아픔까지 겹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환자들이 수혈하는 것을 늘 봐왔으면서도 내가 수혈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하고 살았던 것 같다. 우리네 삶 속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예기치 않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가 불쑥 나타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때를 생각하며 빚진 마음으로 갚아가고 있다. 즐거운 마음으로 헌혈을 하고 헌혈증을 받고 돌아오며 생각한다. 내가 수혈받은 피 한 방울도 누군가의 헌신에 의한 것 아니겠는가. 그의 헌신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오늘 나의 작은 헌신이 누군가의 소중한 생명을 살리는 데 기여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내게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그때를 위해 나름 저축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오십 줄에 들었음에도 헌혈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이는 건강하다는 증거다. 다행스럽게도 건강한 사람은 오래지 않아 채취한 혈액만큼 채워진다고 하니 가을쯤에 한 번 더 하리라 다짐한다. 혈액의 부족 사태를 막아 보려는 적극적인 대책으로 공무원 헌혈은 공가 처리가 된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단비다. 봄비로 수혈받은 들녘은 머지않아 푸름으로 충만할 게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