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숲과 빛을 따라 어슬렁거리는 느린 여행

만천하스카이워크.
단양강 잔도.

(동양일보) 하늘은 내게 큰 돈을 주지 않았다. 스스로 피땀 흘려 일할 수 있는 열정을 주었고, 일한 만큼의 대가를 주었으며.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쌀과 곡식을 주었다. 하늘은 내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오만과 독선과 욕망에 빠지지 말라고, 항상 낮은 자세로 임하라고, 이웃과 함께하라며 봉사의 정신을 주었다.

하늘은 내게 폼 나는 외모를 주지 않았다. 큼직한 키에 멋진 얼굴을 마다할 사람 어디 있겠냐만 자칫 건방떨까 걱정돼 작은 키에 못생긴 얼굴에 머리털까지 숭숭 빠진 모습이다. 그렇지만 아주 못생긴 모습을 주지 않았다. 하늘은 내게 위대한 스승과 든든한 백을 주지 않았다. 스승이 많고, 백이 많으면 건들거리고 자만에 빠질 수 있다며 스스로 스승이 되고, 스스로가 백이 되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단련할 수 있는 강인함을 주었다.

하늘은 내게 사람들이 탐낼만한 그 어떤 것도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깃돌 고르듯, 민들레 홀씨처럼 가까이 하면 삶의 향기 나는 사람, 이 땅에 값진 그 무엇이 되라며 책을 읽고 글밭을 가꾸며 가슴 뛰는 일을 하도록 했다. 내 삶의 최전선에서 알곡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열정과 도전을 주었다. 그래서 앙가슴 뛰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단양은 볼 것 많고, 먹을 것 많으며, 놀 것도 많다. 다니엘 핑크는 <새로운 미래>의 조건으로 디자인, 조화, 공감, 스토리, 놀이, 의미 등 여섯 가지를 제시했는데, 단양은 이 모든 요건을 갖춘 고장이 아닐까. 오늘은 단양에서 놀며 힐링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섰다.

단양역에서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보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진철교와 상진대교가 마중 나온다. 상진대교를 건너니 단양의 마스코트 온달장군과 평강공주가 맞아준다. 이어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단양강잔도 길로 이어진다. 여기서부터 만천하 스카이워크 입구까지 1,200m의 길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폭은 겨우 2m 정도이니 아찔하다. 그럼에도 주변 비경에 눈과 가슴이 삼삼하다. 여행은 언제나 신비다. 단양강잔도는 하늘에도 풍경, 바닥에도 풍경, 강과 숲속에도 풍경이다. 오월에 피는 꽃을 보며, 바람과 햇살을 벗 삼아 걷는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면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은빛 물결이 밀려온다.

만천하 스카이워크에 다다르자 새로운 호기심이 요동친다. 빙글빙글 띠 같은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유리바닥으로 만든 하늘길이다. 남한강과 소백산의 풍경이 병풍처럼 한 눈에 들어온다. 120m 수직 낙하다. 갈피없던 마음이 아찔함에 화들짝 놀란다. 인간은 본래 모험을 즐겼던가. 개척과 도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 새로움을 찾아 길을 나서는 순례자이며 탐험가다. 이곳의 절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만천하 스카이워크에서 내려와 수양개빛터널로 발길을 돌렸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져 방치됐던 길이 200m, 폭 5m의 지하 시설물인 수양개빛터널은 다채로운 빛의 향연을 감상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공간이다. 터널 내부에서는 최첨단 영상·음향 시설 쇼가 벌어지고, 외부는 5만 송이 LED 장미가 빛을 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시공을 뛰어넘으니 서두를 필요도, 다투어야 할 이유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기쁨을 만끽하면 된다.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 구경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 충주댐 수몰지구의 문화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중기 구석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문화층에서 발굴된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충북대학교박물관 이융조 교수팀은 이 일대에서 50여 곳의 석기제작소를 발견했다. 2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의 신비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국내에는 수많은 구석기와 원삼국 유적이 있지만 수양개처럼 다양하고 방대하며 체계적인 곳은 없었다. 일부에서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는데 충분한 이유가 된다. 나는 그곳에서 빛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못 다 이룬 꿈을,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보았다.

내친김에 수양개 인근 현곡리의 새한서점에 들렀다. 숲속의 헌책방이 지역의 명물이 됐다. 헌책만 13만 권이나 된다. 주인 이금석 씨는 1979년 헌책 노점상을 시작으로 서울 답십리, 길음동, 고려대 앞 등에서 30여 년 헌책방을 운영했다. 고서점을 들락날락 하던 서울의 웬만한 사람들은 새한서점을 기억할 정도다. 그는 2002년 고향인 단양으로 낙향했다. 서울에 있던 헌책을 옮기는 데만 6개월 걸렸다. 서울 한 복판에 있다고 해서 책이 잘 팔리는 게 아니다. 영국의 헤이온와이처럼 산골마을이 책마을로 변신하고 연중 책잔치를 하는 곳도 있다. 그래서 자연을 벗 삼아 책과 함께 남은 여생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자연 속에서 책과 함께 달달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면 이 또한 축복이다.

오월은 삶의 향기가 물들고 스미는 계절이다.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니 새새틈틈 삶의 향기를 만들면 좋겠다. 여행을 통해, 낯선 풍경 속에서, 앙가슴 뛰는 사랑을 하면 좋겠다. 봄바람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간다. 햇살이 눈부시다.

■ 글·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 사진·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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