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논설위원/ 청주대 명예교수

 

박종호 논설위원/ 청주대 명예교수

(동양일보) 녹음방초승화(綠陰芳草勝花)라는 용어가 있다. ‘우거진 나무그늘과 싱그러운 풀이 꽃보다 낫다’는 뜻이다.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지만 잠깐 피었다가 사라지는데(短命) 비하여 녹음과 방초는 긴 날 동안 하루가 다르게 더욱 짙어져서 자연의 극치를 이룬다. 연초록으로 시작하여 진초록으로 깊어진다. 새댁과 같은 청순함과 어머니 품 같은 포근함과 태산과 같은 믿음을 준다. 그리움의 색깔이기도 하다. 안락을 의미하는 색상을 간직하고 있어 가까이 할수록 편안하고 차분해 진다. 마음의 치유(힐링)에 도움이 된다. 또한 녹음은 법열(法悅)을 느끼게 하고, 대자연의 신비에 취하게 하며, 초록의 물결(錄波)은 하늘을 더욱 젊게 한다.

생명이 고동치고 약동하는 5월이다. 그래서 5월은 이러한 풍경에 가장 잘 조화될 수 있는 가정의 달로 다시 태어난다.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스승의 날(15일)’, ‘부부의 날(21일:둘이 하나가 되는 날)들을 정하여 녹음방초로 대궐을 만들고 초록의 사랑을 나눈다. 미의 여신인 ’5월의 여왕‘도 선출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달이다. 연중 가장 아름답다. 5월을 맞아, 퇴색할 줄을 모르고 언제나 새것처럼의 선도(鮮度)를 자랑하는 짙음을 마음의 여백에 꽉꽉 채워보면 어떨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해 본다. 초록의 삶을 다짐하자는 것이다. 룻소의 말대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스피노자의 말대로 ‘자연을 통해 신(God)을 볼 수 있는’ 대승적(大乘的), 대아적(大我的), 서정적인 삶을 설계해 보자는 것이다.

초록을 사랑하는 삶은 생명을 사랑하는 삶이다. 생명은 하늘의 뜻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한없이 고결하고 숭고하다. 소생과 탄생의 계절인 봄이 되면 생명은 초록의 잎으로 태어난다. 엘리엇의 표현대로 ‘죽은 땅으로부터 라일락이 피어나듯’ ‘무(無)’에서 ‘유(有)’로의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충만한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초록을 사랑하는 삶은 옛 시작을 사랑하는 삶이다. 능지고시 시위도야(能知古始 是謂道也)라는 연구(聯句:본받을 만한 말)가 있다. 옛날의 시작을 아는 것, 이것이 도(道)로 통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도는 근본 및 깊이 깨달은 지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기에 도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이고 가야 할 길이라 말할 수 있다. 초록은 이런 길을 가리키는 안내판이다. 식물은 뿌리가 있어야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그렇듯이 인간도 그 진원지를 알고 늘 그곳을 사랑하여야 한다.

초록을 사랑하는 삶은 소생과 부활의 삶이다.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나니 물가에 서있는 나무위에 앉아 있는 새들이 노래를 불렀다’는 한시 구절을 대하며 소생과 부활의 크고 깊은 의미에 새삼 놀란다. 소생한다는 것, 죽음에서 살아난다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다. 더 없는 기쁨이고 환희이다. 그렇기에 미물인 새들도 좋아서 노래로 환호한 것이 아니겠는가. 새의 찬가는 자기와 동무할 생명체가 생겨서, 또는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딱딱하게 굳어있는 땅이나 나무껍질을 뚫고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식물의 강인함과 창조력에 대한 경이의 소리였을 것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초록의 옷을 입고 나날을 소생과 부활로 다시 태어나는 삶을 영위하여야 한다. 이것이 5월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초록을 사랑하는 삶은 사랑에 충실한 삶이다. 사랑은 남녀 간의 애정교류 뿐만 아니라 사회구성원 간에, 근린주민들 간에 신의를 지키고 배려하고 힘이 되어주는 순수한 인간관계 및 공동체의식 등을 망라한다. 무엇보다 인간을 존엄성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보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마음이고 정이다. 인간은 날이 갈수록 더욱 짙어지는 5월의 지엽(枝葉)처럼 진하게 물들 수 있어야 한다. 무성하고 울창하게 우거져야 한다.

그리고 초록을 사랑하는 삶은 철학을 사랑하는 삶이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으로 본질, 진리 등과 친하다. 그렇기에 초록의 사랑은 본질과 진리의 사랑인 것이다. 철학을 사랑하여 그것을 삶의 출발점 내지 지표로 삼는 사랑인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하게, 불유구(不踰矩)하게 살게 하는 지혜인 것이다.

지구가 온통 녹파로 물결치는 5월이다. 그 5월이 가고 있다. 다 가기 전에 신록을 보면서 초록을 사랑하는 삶을 다짐하는 것이다. 모든 날을 이 달의 녹음처럼 초록이게 하는 것이다. 초록으로 궁전을 짓고 생명의 탄생, 소생과 부활의 기적, 불변의 사랑, 심오한 철학 등으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이다. 온통 초록의 정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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