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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고령사회 고령자를 생각하다 : 노년철학 국제회의 참관기
동양포럼- 고령사회 고령자를 생각하다 : 노년철학 국제회의 참관기
  • 박장미
  • 승인 2019.05.27 19: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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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노인과 아이를 바라보며 -철학, 문화, 그리고 문명사적으로 본 관점-

 

원혜영(동국대학교 강사, 초기불교 전공)

지난 3월 7일부터 9일까지 열린 노년철학 4회 국제회의는‘노숙년 세대· 중장년 세대 ·청소년 세대: 3세대 상화 ·상생 ·공복 사회를 향하여’란 대주제 아래 개최됐다. 학술대회의 핵심주제는 노인과 아이에 관련된 것이다. 얼핏 보면 어렵지 않은 주제 같지만 노인과 아이를 연관하기란 쉽지 않다. 살아있는 역사적인 증인인 노인에게 경험을 배우고, 아이에게는 놀라운 창조력을 배울 수 있다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 늙어서 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돌아간 노인을 관찰하며, 아이에게서 성숙한 면모를 관찰하며 서로 간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가는 과정들은 특별하다. 이 글은 노인과 아이를 신비적인 존재로 관찰하고 철학, 문화, 그리고 문명학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번 포럼에서 일본은 각각의 세대 구성원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단순히 노인과 아이를 복지 차원으로 대상화하는 한국과는 달랐다. 일본에서 노인과 아이는 전통과 의례를 배경으로 마음 속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존재로 그려지고 있어서, 한국사회의 획일적인 복지차원의 처리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앞으로 보다 낳은 우리 미래를 설계해 봄직하다.

아이와 노인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동감할 수 있는 감정들을 한국사회에서는 적극적으로 논하지 않았다. 일본학자 가마타 토지(鎌田東二, 죠지대학 교수)의 <옹동론(翁童論)>은 한국사회에서 가족 간의 친밀하게 오고 갔을 법한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저자가 직접 오랜 기간 숙고를 통해 신화, 민담, 전설, 개인체험을 통해 아이와 노인을 관찰하고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고 내린 결론들이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옹(翁)은 노인을 말하지만 지혜나 예지의 상징이고 동(童)은 아이를 가리키지만 생명과 힘을 뜻한다. 가마타 토지는 그의 아이를 처음 접했을 때를 회상하며, ‘처음 낳자마자 아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할아버지 모습과 닮았고, 둘째 날에는 울고 있을 때 원숭이 같았다’고 말한다. 그의 상황은 종종 우리도 경험한다. 부모가 아이를 낳았을 때, 자신의 2세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보람이나 목적달성 같은 것은 온데간데없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닮았다. 2세대들은 자신을 닮은 3세대를 낳은 것일까? 아니면 1세대의 복제품을 낳은 것일까?

가마타 토지 교수는 조부모가 손자가 된다거나 다시 태어난다거나 하는 사상이 일본지역의 민담과 전설에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소개한다. 한국사회에서 조부를 닮은 손자는 가족사회에서 더 친밀한 구성원으로 유대감을 더한다. 그가 자신의 아이를 처음보고 자신의 아버지를 회상한 것은 한국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신기하고 신비한 체험처럼 예민하게 말한다. “둘째 날 자신의 아이가 원숭이 같았다”는 그의 말도 나에게는 그가 자신의 아이를 원숭이처럼 본 것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가마타 토지 교수는 내가 보기에 원숭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나만의 느낌일 수 있지만, 그의 아이는 정확히 그의 혈통을 이어받았음이 확실하다. 가족구성원 중에서 아이에게 그의 할아버지의 모습을 연상하는 풍습은 오랜 혈통중시 사상이 내재되어 있음도 분명하다. 일본에서 아이와 노인, 즉 3세대와 1세대의 연관성은 ‘환생’을 믿는 민속학적 전승에 기인한다.

일본문화 속에서 아이와 노인은 사회적 약자이기도 하고 배려대상으로도 보지만, 신비한 존재로 비춰진다. 일본신화와 민담에서 노인과 아이는 가장 신(神)에게 가까운 존재로 서로간의 상보적이고 상호침투 가능한 존재로 그려진다. 아무래도 불교적 윤회와 일본신도의 경향이 묘하게 복합된 것 같다. 그 복잡한 설명 속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묘한 원칙 같은 것을 발견한다. “노인 속에 아이의 마음이 있고, 아이 속에 노인의 마음이 있다” 노인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아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성숙되고 배려 깊은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인간 속에는 두 명의 아이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겉의 아이, 또 하나는 속의 아이이다. 겉의 아이는 늙어가지만 속의 아이는 지속된다.” 우리 모두 이런 말들에 공감한다. 아이와 노인은 약하고 행동반경에 제약이 있고 정착성이 있으며, 자연으로부터 받는 감수성이 뛰어나다. 자연과 사물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중장년층이 사계절을 단순하게 받아들인다면, 노인과 아이는 봄의 화려한 꽃에 감탄하고 여름의 더위에 민감해하고 가을의 낙엽에 아쉬워하고 겨울의 눈보라를 무방비상태로 받아들인다. 중장년층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번 봄에도 꽃이 피었네 하고 무심히 보고, 더위에 대비하고, 가을을 마냥 즐기고 겨울을 준비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반면 아이와 노인은 그 꽃들보다 아름다운 것들이 주변에 있음을 주시하고 아련한 것들, 연약한 것들, 곧 사라져갈 그것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연약하지만 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며 순응한다. 아이와 노인은 약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미래로 나아가려고 하고, 강한 자들에게서 피해 받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애쓴다. 아이는 스스로 커갈 수 없어서인지 어른들의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예쁜 짓을 하며 자신을 보살피는 부모에게 어필한다. 노인도 자신을 해치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고 주변인들의 마음상태를 유심히 관찰한다. 노인과 아이가 자연스럽게 공동체 안에서 보호받고 생활하기는 힘들지만 그들은 살아가는 방식을 본능적으로 체득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아이는 노인에게 거리낌 없이 대한다. 노인도 아이를 보는 눈에 따스함이 담겨있다. 아이는 노인의 늙음이나 힘없음 그리고 일반 성인들이 노인을 혐오하는 그 자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노인 그대로 자연스럽게 대한다. 아이는 문명사적인 시각에서 노인을 보지 못한다. 자연그대로 대한다. 노인과 아이는 힘의 논리를 감지하지만 자연스런 감정에 더 치중한다. 특히 아이는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의 차이를 두지 않고 자연 그대로 그들을 바라볼 줄 안다. 부정적 시각이 아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편견 없이 대한다. 조부모들도 그들의 자식보다 손주에게 아낌없이 애정을 준다.

또한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주이멸(生住異滅),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치를 아는 사람들은 아이와 노인의 단점을 자연 그대로의 이치로 받아들인다. 지혜로운 사람들만이 아이와 노인의 신체적 변화와 정신적 특성에 생하고 소멸하는 시작과 끝자락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그리고 아이와 노인에 관련된 종교적이고 민속학적인 신비한 이야기에 매료된다. 영적 성향을 가진 그들을 인정한다. 아이와 노인에게는 영적인 신비가 존재하고 있어서 인류문화와 문명에 대해 중요한 시각이 내재하고 있음을 안다. 그들이 가진 본능적이면서도 경험적인 통찰력은 예민한 감수성처럼 독특한 지점을 점유한다. 아이의 의문이나 발상에서 천재적 창조력을 보고 노인의 경험과 지혜에서 대처하는 안목과 거시적인 미래를 예견한다. 그들을 소외하고 혐오하고 이용하려고 하는 이들은 그런 자연의 이치를 알지 못하며, 물질문명의 인류역사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저버리는 행위를 한다.

문명이 우리 사회를 진보하게 만든다는 견해에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그러한 문명에서 노인과 아이를 다르게 재단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문화와 문명을 대척점으로 보지 않기에, 노인과 아이문제를 문명사적으로 놓고 있는 일부 학자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말하려는 핵심요지는 알 수 있다. 문화마다 노인과 아이를 다르게 보는 시각이 아니라, 문명사적으로 노인과 아이에 대한 시각이 작동하여 부정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과 정보기술이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인류의 고원한 존재와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동의한다. 우리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는 것에 찬성할 수 있는가?

물질문명이 가진 미시적이고 협소한 미래가 아니라 통찰력 있고 어떠한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능력과 세계를 노인과 아이에게서 접할 수 있다. 노인과 아이는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명, 인간에 대한 축복이 어떠한 것인가를 조용하게 내재하고 있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물질문명이 가진 혜택과 아주 다른 차원에서 노인과 아이의 문제는 말해져야 한다.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은 요란하고 시끄럽게 확실한 진보를 보장하는 듯이 과장한다. 그러나 인류는 가치 있는 것을 내 주고 현란한 포장지에 현혹할 만큼 무지하지도 않다. 물질문명이 가진 최대한의 이익보다는 인간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하는 최소한의 한계점까지라도 보장하려는 움직임이 앞으로 전개되고 비중 있게 논의되리라 믿는다.

이번 한일 포럼은 민속학, 인류문명과 사회복지, 그리고 철학에 관련한 학자들이 모여서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무이한 이상으로 정의되는 문명을 폐기하고, 인류의 엘리트층 또는 소수의 특권의 개인이나 집단에 국한된 문명과 결별하고자 하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였다. 미국사회에서 백인 중년 남성이 실질적 권력핵심에 있다는 논리도 이런 문명사에 함께한 맥락이다. 노인, 아이, 여성은 이러한 문명에서 소외된다. 과연 우리는 동의할 수 있는가? 우리한국 사회도 이런 문명사에 합류할 것인가?

일본 학자 기타지마 기신 교수(욧카이치대학 명예교수/ 정토진종 다카다파 쇼센지 전 주지)의 ‘노인과 어린이와 미래공창’에서 언급한 ‘무시오쿠리 행사’(‘벌레 쫓기’행사)는 이러한 문명사회에서 노인과 아이가 마을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행복하게 바라보는 의미 있는 축제로 일상화한다. 노인과 아이는 특별히 배려하거나 주목해야 하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의 일상적인 구성원이다. 무시오쿠리 행사는 풍작을 기원하여 해충을 쫓는 행사이다. 횃불을 써서 벌레를 다른 지역으로 내쫓은 것이 목적이다. 불살생의 종교의식이다. 인간과 자연의 상생뿐만 아니라, 지역공동체에서 축제처럼 벌이는 과정 속에서 노인, 아이, 여자, 장년층 등이 각자의 역할로 분담하여 전원 참석한다. 이러한 참석 과정에서 아이들은 자기중심주의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나이든 노인에게 배우고, 아이들이 흥미롭게 참석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중장년의 부모들도 열심히 돕는다. 풍작을 기원하는 사자춤을 추는 아이, 그것을 지도하는 청장년층, 식사를 준비하는 여성들, 노인들은 사자춤이 잘 전개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무시오쿠리’ 행사의 주체로 이 행사가 과거부터 이어올 수 있도록 행사의 대부분을 준비한다. 경험 있는 노인들은 실행력에서 완성도가 있고, 조그만 실패에도 꺾이지 않은 유연함을 가졌다. 아이들은 무시오쿠리 행사를 주관하는 노인들에게서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배운다. 일본 도미다 지역에서 실행하는 ‘무시오쿠리’ 행사는 노인과 아이들을 포함하여 전 구성원을 활발하게 교류하게 한다. 나는 현대문명사회에서 이런 이상적인 행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고전 <자따까.의 이야기 한 편을 현대에 재현하는 것 같아서 충격적이었다.자따까는 소외된 인간계층에게서 지혜를 찾고 공동체에 필요한 존재임을 부각시키는 텍스트이다. 노인, 아이, 여성, 힘없는 존재들의 지혜와 지략을 볼 수 있어 재미있다. 무시오쿠리 축제처럼, 지구촌 어딘가에 이렇게 노인이 주축이 되고 아이가 행복해하며 모든 세대가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놀랍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이런 축제는 행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류학자들은 아프리카를 주목한다. 왜냐하면 인류문명이 아직 전파되기 않는 아프리카는 고유의 문화 속에 인류가 문명에서 벗어나 어떻게 성장하고 발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측면이 있지만, 문명권에서 영향 받지 않는 인류가 어떠한 공동체를 구성하는가는 인간존재의 온전한 성장이 어떠한가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은 점차적으로 노인을 요양원이나 특수한 거주지에서만 활동하고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가고 있지만, 일본의 무시오쿠리 행사에서 노인은 일상보다 더 행복한 공간과 시간에 모든 공동체 구성원에게 공개되고 있다. 이런 차이는 문화와 문명을 어떻게 받아들여 적용하고 있는가의 차이에서 오는 결과일 것이다. 노인과 아이에 대한 존재적 자각, 그리고 여성에 대한 자각의 차이가 문명사의 중요한 기로가 될 것이다. 우리 한국은 어떤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이번 포럼에서 논의된 노인과 아이에 대한 인식론적인 발달 과정상의 차이도 주목해 볼 만하다. 오가와 하루히사 교수는 맹자가 대인(大人)과 갓난아이(赤子)를 규정하는 말에 주목한다. “대인(大人)이란 갓난아이(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자이다” 대인의 마음은 만 가지 변화에 통달하고, 갓난아이의 마음은 순일하고 무위하다고 한다. 대인은 사물에 이끌리지 않아서 순수하고 한결같아 거짓됨이 없다. 아이와 대인의 공통점은 그런 순수함에 있다. 아이와 존경받는 대인은 가짜를 부정하는 참된 마음을 가졌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 이익의 흐름에 따라 가는 오염된 일반인의 모습과는 다르다. 대쪽 같은 인품을 가진 인물이라고 존경할 수도 있지만,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인물로 평가될 수도 있는 것도 문명사적인 견해일 수 있다. 아이의 마음(童心)이 진심이며 최초의 한결같은 마음이 대인에게서도 발견되는 진리를 고전의 유교문헌은 전한다.

오강남 교수는 통합심리학자 캔 월버(Ken Wiber)가 한 말을 인용하여 오가와 교수의 의견에 일정부분 합의하면서 다른 의견도 주었다. “아이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있다가 성인이 되어 주관과 객관, 그리고 인식을 하게 된다. 주관과 객관을 넘어서서, 즉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 성인이기 때문에, 대인과 갓난아이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마음이 같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인의 마음이 만 가지 변화에 통달한다는 의미는 캔 월버가 말한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인식과 맥락을 함께 한다. 노인, 그들은 만 가지 변화에 통달하여 주관과 객관의 인식을 초월하여 얻은 노련한 경험의 소유자가 아닐까? 아이는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경험 있는 성인은 그것을 초월한다. 둘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관련된 논의는 흥미진진했다. 지혜 있는 노인을 대인으로 대입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린 아이의 무조건적인 순수함을 찬양하는 것에 반대하는 서양학자의 시각에서 강자와 약자의 힘의 논리, 그리고 문명사적 논리를 대입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강약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는 물질문명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노인과 아이는 언제나 약자 편에 서있다. 순환적인 문명이 계기가 되어 중립적이고 복수적인 문화론이 개입하면서 우리 인류는 문명의 부정적인 측면을 개량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시도하는 중이다. 동심(童心)을 위험하다고 보는 견해, 즉 순진한 생각이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도 문명사적인 패러다임에 일정부분 동의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고자 이 논의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가진 영적인 측면, 신비적 측면, 고원한 측면을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문명으로 덮어버리는 실수를 하지지 말아야 한다는 자각의 차원이 필요하다. 근대사상의 굴절과 좌절을 극복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사회구조의 연대성과 보조성의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는 데는, 동아시아의 공동체의 연대가 절실하다. 노인과 아이는 유교, 불교, 도교의 문화권 속에서 전통적 주제가 토대가 되어 문명사적인 진보보다 더 고차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국제적이고 지구촌적인 인류공동체의 상화, 상생, 공복사회를 위해서도 아주 필요하고 중요하게 작동할 동력이 있다. 문명은 날카로운 면으로 인류를 재단하려고 하지만, 인류공동체는 인류존재 자체가 가진 고원한 영적 매력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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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19-05-28 01:06:59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 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 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됨. 최고 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 원)이 승계하였습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교황윤허 서강대. http://blog.daum.net/macmaca/2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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