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시인

(동양일보)

# 약 120년 전까지만 해도 ‘봉수대(烽燧臺)’가 유용한 통신기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밤에는 봉(烽:횃불), 낮에는 수(燧:연기)로써 위험을 알리는 전통적인 조기경보 시스템이다.

‘5월의 봉수대’에선 방식은 다르지만 요란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따뜻한 얘기를 전하고 싶다.

첫 번째 소식은 ‘봉하에서 온 편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맞아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맞닥뜨려온 정치사와 대통령직을 그만두고 고향 봉하마을에 돌아와 주민들과 소통하는 모습까지 두루 조명한 특집프로그램이다. 노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벌써 10주기라니, 세월 참 빠르네 하는 일상적인 감회부터, 조문 온 전 ‘부시’ 미 대통령의 팔짱을 끼고 안내하는 손녀 노서은 양을 애틋한 심정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이라는 정점에 서기까지 순탄치 않았던 정치역정에서 선택의 순간마다 겪어야 했던 고뇌의 무게와 강인한 의지가 오버 랩 되며, 끝내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어두운 역사의 일면까지 잘 감싸서 보여주고 있다.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밀짚모자를 쓰고 자전거 뒤에 어린 소녀를 태우고 달리는 노무현재단의 로고가 이제는 노서은 양이 할아버지를 태우고 달리는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불행한 말로가 현재 진행형인 지금, 수많은 인파가 봉화마을을 채우고, 그가 보고 싶어 아직도 눈물이 난다는 그들의 모습에서 ‘멘토 부재 시대’라고 쓴 지난번 칼럼이 맘에 걸린다. 늘 곁에 붙어서서 조언해주고 챙겨주는 사람만이 ‘멘토’가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한 정치인이 보여 준 인생 다큐멘터리가 ‘멘토’로서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노무현’의 가치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수식어는 참 많다. 그러나 그에게서 떠올릴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가 ‘시민’이다. 대통령의 위치에서 바라보았던 대상이 ‘국민’이었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바라보았던 대상은 ‘시민’이었다. “시민으로 돌아왔다.”. 퇴임 일성으로 스스로 정의한 노무현의 정체성이다. 처음 봉하마을 방문객들을 맞이 할 때도 ‘시민 여러분’이라 불렀다. ‘국민’과 ‘시민’, 이 작은 차이가 ‘새로운 노무현’을 만들어 가고 있는 원동력이다. 자리에서 물러나서도 ‘국민’을 바라보는 행보를 했다면 그는 이미 10년 전에 잊히어진 이름이 됐을 것이다.



# 또 하나, 프랑스 칸(Cannes)에서 횃불이 타올랐다.

황금종려상,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에서 한국영화 100주년의 해에 큰 선물을 안겨줬다. ‘기생충’이란 제목도 낯설고 ‘봉’이라는 성씨도 흔치 않지만, 남의 집 얘기처럼 먼발치에서만 지켜봐야 했던 황금종려상이 ‘낯선 감각’의 봉준호 감독에 의해 우리에게도 왔다.

지난해 9월 19일, 77회의 크랭크 업을 마친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이 황금종려나무 잎사귀를 흔들며 오늘 개봉한다.

영화는 보면 안다. 5월 봉수대에서 올린 횃불의 의미가 중요하다.

황금종려상은 1955년 제8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수여된 이래 20년 만인 1975년 제28회 영화제부터 부활한 상이다. 황금종려상은 칸영화제의 상징이며 해마다 최고수상작의 감독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몇 차례 먼저 수상한 이력이 있지만 아무러면 어떠하랴. 올 세계 최고의 영화는 명실상부 한국영화 ‘기생충’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가. 한국영화 100주년 최고의 해에 최고의 상이 찾아왔다. 황금종려상 트로피는 최고의 디자이너, 최고의 장인이 만나 종려나무 잎사귀를 형상화해서 제작했다. 종려나무는 칸시(市)의 문장에 들어갈 만큼 칸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마중 나온 군중들이 ‘높은 데서 호산나’를 환호하면 흔들었던 상서로운 나무이기도 하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 참 많이도 익숙하고 여전히 낯설기도 하다. 리얼리티와 디테일, 그만의 판타지를 결합해서 빚는 그의 작품세계는 이제 더 깊고 널리 펼쳐질 것이다. 12살부터 영화감독을 꿈꿔 왔던 그가 그 꿈의 한 지점에 도달함으로써 ‘멘토 외면의 시대’에 우리의 멘토가 됐다. 5월이 간다. 6월에도 봉수대에서 뽀얀 연기를 올릴만한 희소식이 들어 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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