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 조명희 건국 훈장 전수식에 다녀와서-

지난 4월 11일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건국훈장 애국장 전수식
지난 4월 11일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건국훈장 애국장 전수식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조성호 <수필가. 포석의 종손>

멀고도 가까워진 나라, 러시아

 

조성호 <수필가. 포석의 종손>
조성호 <수필가. 포석의 종손>

 

모스크바를 두 번째 방문한다. 처음은 27년 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백쩨미르 지역에 아파트 고려인 밀집 지역이 생겼는데 ‘조명희 거리’로 명명식을 하겠다며 우즈베키스탄 정부가우리 후손들을 초청, 행사에 참석하느라 모스크바-타슈켄트-하바로프스크를 거쳐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 2019년 4월 11일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서 포석 조명희 선생에게 ‘건국 훈장 애국장’을 전수한다 하여 후손들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와, 우리는 환호했다. 직계는 아니지만 우리 가문에 이런 영광이 어디 있나. 조명희 할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종조부, 넷째 할아버지여서 아주 가까운 사이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겐치아인데도 1년 신문기자로 근무하고 번역하여 겨우 셋방 신세를 유지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한집에 세 들어 함께 살았던 글벗 민촌 이기영의 글에는 그래도 이때가 가장 형편이 좋았다고 회고했다. 집안 살림에 아무 도움도 못 주다가 소련 망명을 하는 바람에 집은 더욱 호구지책이 막막했을 건 뻔한 노릇이다. 1992년에 갈 때는 아에로플로트 러시아 항공을 옹송그리며 갔는데 이번에는 대한항공으로 좌석이 다소 편했다. 그때는 서울에서 ‘88올림픽’이 열리며 소련이 참석하며 1등을 하고 외교적으로 우리와 쉽게 소통하며 1990년 한-러 국교가 처음 열렸다. 그래도 북방국가로 서먹서먹한 사이여서 상당히 긴장한 편이었다. 냉전시대에는 ‘철의 장막’이라며 경계하던 러시아가 이제는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유학한 김 안드레이가 안내 맡아

 

그때는 황유리(포석의 처남 황동민 교수의 아들)가 마중을 나왔는데 이번에는 김 안드레이(포석의 외손자)가 공항에서 반갑게 맞는다. 그는 포석의 장녀 조선아 아주머니의 장남으로 이번 여행의 길잡이 역할을 즐겨한다. 헬싱키 대학 고송무 교수의 권유로 한국문학을 청주 서원대학에 유학 오게 되었고 이후 타슈켄트국립대학 교수를 하다가 지금은 모스크바 캐피탈 그룹에서 근무한다. 고송무 교수는 이제 고인이 되었지만 구주의 한글 신문에 포석의 문학과 삶에 대해 널리 알리는 역할도 했다. 당시만 해도 포석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한국에 잠시 귀국했을 때는 귀한 시간을 내어 택시를 대절하여 청주의 후손인 우리를 찾아오기도 했다.

이튿날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 들르니 한국 궁궐 담장처럼 무늬를 넣은 익숙한 담장과 정문에 태극 문양을 넣고 무엇보다 소나무가 정겹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훈장 전수 행사가 열렸다. 우윤근 대사를 중심으로 이진현 총영사와 직원들이 바삐 움직인다. 모스크바 고등경제대 김혜란 교수는 조명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인연으로 꽃다발을 선사한다. 최 발렌틴 독립유공자후손협의회장, 박현택 모스크바 한인회장도 서로 반갑게 인사한다. 낯선 나라에서 모임도 가지며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대한민국 국가 건립에 이바지한 공로가 커 러시아 각처에서 훈장을 받을 후손들이 삼십여 명 모였다. 우리 집안이 가장 멀리 고국에서 온 셈이다. 임정 100년, 삼일운동 100년을 기념하며 정부에서 비로소 역사를 재조명한다. 독립운동의 실상을 더 발굴하고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할 시점이다. 일본이 역사를 왜곡할수록 우리 자신이 더 진실을 알아야 한다.

포석의 망명 덕분에 지난번이나 지금이나 낯선 나라를 방문하게 된다. 마치 포석의 민족혼의 힘이 우리들이 만나도록 힘을 쓴 게 아닐까.

우리 집안은 따로 오후 3시에 캐피탈 그룹 17층에서 포석의 차남 조 블라디미르 아저씨와 손자 파웰 캐피탈 그룹 회장이 바쁜 중에도 참석하여 환담을 나눈다. 훈장을 받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보드카로 축배를 든다. 가문의 영광이라며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하고 소감을 말한다. 블라디미르 아저씨는 연설 솜씨가 있어 오늘의 훈장 추서식에서도 대표로 한 말씀을 했다. 지난 2015년 충북 진천 ‘포석 조명희문학관’ 개관식에서도 개관에 임하는 소회를 잘 밝혔던 터였다. 김 안드레이의 즉석 통역으로 우리는 숙연하게 당시 1937년 사건도 들을 수 있었다. “원동지구에서 갑자기 화물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쫓겨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태어난 지 40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44세 한창 작가 활동을 할 젊은 나이였는데 안타깝게 돌아가셨습니다.” 이 장면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적 있다. 오늘의 정부 훈장을 받으면서도 한국 정부에서 늦었지만 아버지의 독립투쟁에 대해 적절한 평가를 내려주신 데 대해 깊은 감사의 인사를 하셨다.

지난 4월 11일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건국훈장 애국장 전수식에서 포석 조명희 선생의 차남 조 블라디미르 캐피탈 그룹 회장. 그의 가슴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포석 선생에게 전수된 건국훈장 애국장이 달려 있다.
지난 4월 11일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건국훈장 애국장 전수식에서 포석 조명희 선생의 차남 조 블라디미르 캐피탈 그룹 회장. 그의 가슴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포석 선생에게 전수된 건국훈장 애국장이 달려 있다.

 

늦었지만 포석의 독립투쟁 평가에 감사

 

 

망명을 했거나 먹고 살기 힘들어 유민의 길을 걷는 동포들이 먼 이국땅에서 곤궁한 삶을 살면서 조국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정성을 후손들은 깊이 인식해야 될 것이다. 가족들은 포석이 망명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을 당시를 회상하며 장한 결정에 박수를 보냈다.

우리 민족이 난관을 잘 헤쳐나간다며 나라가 패망한 후에도, 소련에서도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등으로 버려졌을 때도 잘 버텨나갔다. 나도 포석의 도전 정신을 잘 이어 받아 조 파웰이 회장으로 있는 캐피탈 그룹이 더욱 성장하길 바랐다. 역시 우리 대한민국은 대단한 나라라며 포석의 후손이 이국땅에서 대기업으로 성공한 일에 박수를 보냈다.

포석의 자녀는 삼 남매로 장녀 조선아씨와 장남 조선인씨는 돌아가시고, 막내 조 블라디미르 씨만 남아 영광을 받고 축하를 받는다. 조선인씨 아들 조 안드레아씨와는 처음 인사를 나눈 편이다. 삶에 바쁘다 보니 만날 기회들이 적었다.

27년 전에는 다 젊은 시절이었다. 타슈켄트에서 ‘조명희 거리’ 명명식과 고려인 축제를 지내고 ‘조명희 기념실’에 들렀다. 알리세리 나워이 문학박물관 내에 있는 기념실에는 자녀들과 제자들이 자료를 모아서 조촐하나마 귀중한 고려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근래 KBS TV ‘걸어서 세계 속으로’ 탐방 인기 프로의 타슈켄트편에 소개되어 반가웠다. 당시 귀국길에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포석이 참변을 당하신 KGB며 공동묘지를 들르며 파란만장한 당신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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