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 조명희 건국훈장전수식에 다녀와서- 하

톨스토이의 석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종손들. (왼쪽부터) 조광호 뒷목문화사 대표, 조성호 수필가, 조혜자 소설가.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포석문학의 흔적을 찾아서



6개월 전에 파리에 다녀오며 ‘포석 조명희의 멘토, 빅토르 위고를 만나다’를 쓰며 포석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나 쓰려는 참이었다. 소련은 포석이 망명했던 곳이고, 망명 전 1924년에 톨스토이의 희곡 ‘산송장’을 번역하여 단행본을 내었고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을 번역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이듬해에 단행본으로 출판한 인연이 있어 적어도 이 두 작가의 흔적을 찾을 작정이었으나 시간이 없어 건성으로 방문을 한다.

이번 러시아 방문에는 ‘톨스토이 문학관’에 들르고 우리나라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석상 앞에서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방명록에는 “한국의 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 조명희가 번역한 톨스토이의 희곡 ‘산송장’을 생각하며, 조명희 훈장 전수식에 참석하고. 2019. 4. 12 조성호”라고 썼다. 잘 자란 하얀 터럭이 올올이 살아난 턱수염의 초상화, 젊은 시절과 노년의 흉상, 다양한 사진들이 문학관을 풍성하게 하여 볼거리로도 꼭 들를 만하다.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도 포석의 번역본이 있으니 문학 유적지를 찾았으면 했으나 우리의 일정으로는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내 다니기만도 빠듯하였다. 예전 레닌그라드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선 도스토예프스키의 감옥과 도박으로 얼룩졌던 생애 중 ‘죄와 벌’을 집필하던 센나야 지역의 집과 다리와 층계 등 작품의 무대를 안내원은 소개하는 데 열중하였다.

간질병과 도박으로 쫓기는 생활에서 제때에 원고 마감을 하는 방편으로 속기사 안나를 채용했는데 45세인 작가는 25살 어린 이 여인에게 구애에 성공했다. 두 번째 결혼. 가까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파란 돔이 아름다운 건물을 안내원은 가리킨다. 안나는 진정으로 15살부터 좋아했던 작가를 사랑했고 그가 죽은 후에는 작가로서보다 남편의 사생활을 회고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한 나날들’을 발간했다. 빚에 시달리면서도 성실한 삶을 살았던 작가의 아내. 작가는 행복한 셈이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의 푸시킨 문학관은 전보다 규모를 더 키웠다. 러시아는 우리가 아는 작가들보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가장 좋아한다. 우리의 명사 애송시에서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시를 첫째로 꼽는다. 참고 견디는 데는 익숙한 우리에게 힘을 주었던가 싶다. 사실 우리는 이 시밖엔 모르는데 19세기의 러시아 사실주의를 연 시인 작가로서 학교마다 도시마다 그의 작품으로 넘치고 동상도 곳곳에 있다.

이반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은 농노 해방을 주제로 삼았는데 그의 가정사 그대로다. 아버지는 방탕한 편이고 6살이 많은 배우자로 돈 많은 영주인 어머니를 선택한 이유도 단지 그것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죽자마자 농노들을 해방시켰다. 농노를 소유하고 있는 걸 수치로 여겼다. 포석이 이 소설을 번역한 건 사랑과 혁명이 마음에 들었겠지만 당장 집세를 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 ‘땅 속으로’를 보면 꾸어 쓴 돈을 갚으라는 독촉에 “조금 참으면 내가 겨를을 타서 하다못해 무슨 번역 같은 것이라도 하여 드릴 터이니” 하며 원고료 탈 때까지 참아달라고 사정한다. 전문으로 번역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20년대의 번역들을 근대문학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포석의 역할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포석 자신은 창작이 아니고 번역을 한 저술을 자랑스럽게 여기진 않았을 것이다. 수필 ‘발표된 습작작품’을 보면 최초의 희곡작품이라며 상찬하는 희곡을 초학자리 문학청년일 때 멋모르고 쓴 희곡작품이나 시집도 성장된 입장에서 보면 ‘유치한 것’들이라고 겸손해 한다.

포석의 생애를 한마디로 ‘파란만장’이라고 하듯 고보 시절에는 북경사관학교로 진출하여 무력 투쟁을 목표로 가출하기도 하고 3.1운동 때 만세운동하여 구속되기도 하고, 당시로는 실행하기 힘든 망명을 한 유일한 작가이고, 스탈린 독재시절 처형되었으나 잘못을 인정하며 복권되기도 하고, 망명지에서 사후에 ‘조명희 선집’이 나오기도 하고, 88 해금이 되고, 타슈켄트에는 ‘조명희거리’가 명명되고, ‘조명희기념실’이 생기고, 고향 진천에 ‘포석 조명희문학관’이 서고, 아들과 손자가 거금을 들여 큰 동상을 세우고, 포석문학회에서 ‘포석문학’3호를 발간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시작된 ‘포석조명희문학제’가 해마다 열려 26회나 되었다. ‘연변 포석 조명희 문학제’도 17회 열리고 있다.

그는 여러 번 죽었다가 여러 번 부활했다. 그는 훈장을 받으며 다시 거듭 살아났다.

외국에서 한글로 항일 저항 시를 쓰고, 한글로 글을 쓰고, 한글로 제자를 키우고, 죽어서도 한글 선집이 나오고, 타슈켄트에 기념관도 마련하고, ‘잃어버린 민족 문학사를 찾아가는 작가들의 모임’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문학비를 세웠다. 그는 러시아 디아스포라의 원조였다. 일찍이 이런 작가는 없었다. 그는 불사신인가. 현대문학의 선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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