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노씨 3형제 임진왜란 모두 참전... 조헌과 합세해 왜적과 싸워

공주시 손권배(왼쪽) 부시장이 만경노씨 삼의사 생가지 사우 충의재에서 임진왜란 당시 이들 삼형제의 활약상을 설명해 주며 의병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오른쪽은 최인종 공주시 행정지원과장. 아래 왼쪽부터 충의문, 생가지 사우 경내와 삼의사, 정려.

(동양일보 유환권 기자) 4형제의 어머니는 세 아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비보를 접한다. 하나 남은 마지막 아들, 어머니는 막내만큼은 살리고 싶다는 소망을 정부에 전한다.

군은 고심 끝에 그를 전장에서 데려와 고향의 품에 안겨 주기로 결정하고 부대를 파견한다. 숭고한 국가정신을 보여준 할리우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다.

장소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1592년 조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국의 민초들이 죽창과 낫을 들고 일어섰다.

훗날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의 '비정규 전투병'들을 감안하지 않았던게 전략실패의 원인중 하나라며 후회 했다는 바로 그 민초들 ‘의병’이다.

내일 6월 1일, ‘의병의 날’이다.

경우는 약간 다르지만 미국에 라이언 일병이 있다면, 조선 땅 충청도 공주에는 ‘노이언 일병’이 있다.

충남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에 살던 만경노씨 삼형제.

노응환(盧應皖·1555~1592), 노응탁(盧應晫·1560~1592), 노응호(盧應皓·1574~1592) 3명은 일찍이 공주 목사였던 중봉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공부했다.

임진왜란 발발후 조헌이 의병을 모아 왜적과 전투를 벌이자 이들 삼형제도 조헌과 합세해 칼을 들었다.

그러나 무기의 차이와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노응환은 청주 전투에서, 노응탁은 금산 전투에서 각각 순절한다.

노씨 일가의 대가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한 하늘의 도움이었을까.

막내 노응호 역시 19세에 두 형과 함께 청주전투에 참전해 싸우던 중 군량을 모으기 위해 잠시 진영을 떠났던게 그를 살린 계기가 됐다.

노응호가 군량을 모아 금산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두 형을 비롯한 칠백의사가 모두 순절한 뒤였다.

노응호는 형들의 시신을 수습해 고향에 안치했다. 이들 3형제는 모두 공주의 삼의사(三義祠)와 금산의 종용사(從容祠), 보은의 후율사(後栗祠)에 제향 됐다.

또한 삼형제의 충혼은 ‘중봉집’과 ‘항의신편’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특히 노응탁은 금산의 칠백의총 경역 내에 있는 ‘일군순의비’ 비문에도 기록되어 있다.

4형제가 아닌 3형제라는 사실만 빼면 할리우드 영화 속 ‘라이언 일병’과 사정이 비슷하다.

일가의 형제 모두가 나라를 위해 전장으로 나갔다는 점, 형제중 막내가 전투중에 생존해 고향의 품으로 돌아갔다는 점, 훗날 역사가 그들을 제대로 기린다는 점까지...

그래서 공주의 의병 만경노씨 삼의사중 막내는 ‘노이언 일병’으로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순조 31년(1831)에 증직(贈職)과 함께 명정(銘旌)을 받아 이곳에 정려를 건립했고, 고종 29년(1892)에 우성면 반촌리에 정려를 다시 세웠다.

1981년 현재의 자리에 사우를 세운 후 ‘삼의사(三義祠)’라고 현액하고, 충청남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돼 있다.

삼의사 사우에는 충의문과 삼의사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아래쪽에는 삼의사 정려(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표징으로 세운 작은 누각)도 보인다.

농촌 들녘의 평화로움과 푸른 산자락의 맑은 공기 마시며 주말에 아이들 손잡고 찾아가 볼만한 좋은 곳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일어섰던 향촌 민초들의 의기와 공주 ‘노이언 일병’ 만경노씨 삼의사로부터 민족사의 정통성을 다시 배운다. 공주 유환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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