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절없이 눈부신 소백산 봄빛따라 정인情人인듯 만나는 철쭉, 철쭉

 
 
다리안폭포.
다리안폭포.

 

소백산.
소백산.

 

(동양일보) 봄은 속절없고 눈부시고 하염없고 아름답다. 자연 앞에 서면 매 순간이 앙가슴 뛴다. 산 속에서 아, 철쭉!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입술을 진하게 바르고 산 중턱의 숲에서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철쭉으로 물든 숲 속 어딘가에 내 여인이 있을 것 같다. 숲으로 들어가 진한 입술을 포개고 싶다.

꽃은 식물의 자궁이다. 생명의 중심이다. 그래서 꽃심이다. 그 여리고 순한, 저마다의 자태를 뽐낸다. 빛과 바람과 나비와 벌들이 꽃에게 사랑을 구한다. 꽃들이 입술을 내밀면 수많은 생명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 꽃들은 가슴 뛰는 그 순간의 달아오름을 맑고 향기로운 풍경으로 말한다.

어떤 시인은 “꽃은 지지 않는다, 다만 꽃잎이 떨어질 뿐”이라며 꽃의 순정을 노래했다. 또 다른 시인은 “꿀 1kg을 얻기 위해 벌은 560만 송이의 꽃을 찾아 다닌다”며 꽃과 벌의 진한 연정을 노랬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사랑은 없다. 모든 풍경에는 상처가 깃들어 있다. 모진 상처를 딛고 꽃이 피었으니 그 꽃을 향한 사랑의 노래 또한 진한 땀방울의 가치가 담겨 있다. 이 땅의 모든 꽃들이 아름다운 이유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입에 물고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오늘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노래가 길벗이 돼 주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거리로 나서기도 하지만 기분 삼삼할 때는 노래가 나온다. 소백산을 생각하면 철쭉과 주목 군락지부터 떠오른다. 봄에는 철쭉꽃이, 겨울에는 눈꽃이 가득한 곳이다.

소백산은 해발 1,439m의 험준한 산이다. 어떤 이는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바람의 산이라고 했다. 숲과 계곡과 생명의 신비가 가득하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는 산으로 본 사람도 있고, 사계절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니 바람의 산으로 표현한 것이다. 조선의 실학자 남사고는 소백산의 풍광에 반해 넙죽 절까지 올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산 정약용은 “호호망망 넓은 우주 마음 놓고 즐기거니, 고운 꽃 비단바위 가을되면 아름다워, 나막신 손질하여 안개 서리 밟아보소”라며 단양산수가를 지었다. 그는 전국을 유람하며 조선의 비경과 삶을 글로 남겼는데 단양의 산과 물의 빼어남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소백산은 백두대간의 장대함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민족의 명산이다. 형제봉을 시작으로 남쪽 산맥을 따라 신선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 등을 아우르고 있다. 드높고 거칠게 보이다가도 온화하고 아늑한 풍광이 밀려온다. 꽃과 숲과 바람과 햇살과 하얀 설경이 소백산의 사계를 웅변한다. 소백산은 그러한데 사람의 마음만 정처없다. 그래서 어느 계절에 산을 오르느냐에 따라, 어떤 마음으로 산길을 어슬렁거리느냐에 따라 그 풍경은 제각각이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 주목(朱木)이 그러하다.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주목은 천 년을 살고도 모자라 죽어서 다시 천 년을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다. 어떤 애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까. 드높은 곳에서, 북풍한설을 딛고 하늘과 땅의 기운만으로 그렇게 견뎌오는 너는 무엇으로 사는가. 쓸쓸하기도 하고 우직하기도 한 그 풍경에 가슴이 뭉클하다. 해발 1,200~1,400m의 능선을 따라 도열해 있다. 주목은 조선시대 왕실의 가구로 쓰일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대갓집이나 궁궐의 정원수로 쓰였다. 귀한 나무 보호하겠다며 금표를 붙이기도 했다.

이곳의 주목은 바람의 결을 그대로 품고 있다. 바람에 찢기고 부러지고 휘어진 것들도 많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견뎠으니 그 상처가 가볍지 않다. 주목은 지나온 풍상을 제 다 간직하고 있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마음까지 읽고 있다. 저잣거리의 인간들처럼 가볍거나 헛되지 않다. 천기누설 한 번 하지 않고 그곳에서 그렇게 견디고 있다.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고 했던가.

매년 오월, 소백산에서는 철쭉제를 연다. 누구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할 때 100만 송이의 꽃이 피어난다’고 노래했는데, 이곳의 오월은 꽃들의 낙원이다. 하늘에는 반짝이는 100만 송이의 별이, 땅에는 100만 송이의 철쭉이 나그네의 마음에 시가 되고 그림이 되며 풍경이 된다.

소백산의 풍광을 마음에 담고 다리안 계곡을 기웃거린다. 풍즐거풍(風櫛擧風). 옛 사람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대나무 부채를 만들어 부치거나, 죽부인을 안고 자고, 삼베옷을 입기도 했다. 산에 올라 발가벗은 채 상투를 풀어헤쳐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더위탈출을 했던 것이 풍즐거풍이다. 계곡의 물과 폭포와 우거진 삼림에서 쏟아지는 피톤치드와 음이온은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고 치유다. 길 위의 도파민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모든 욕망 부려놓고 마음수련이나 해야겠다.

■ 글·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 사진·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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