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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교육개혁수단으로써의 융합교육(融合敎育)
풍향계/ 교육개혁수단으로써의 융합교육(融合敎育)
  • 동양일보
  • 승인 2019.06.1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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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송 ESI 교장
한희송 ESI 교장
한희송 ESI 교장

 

(동양일보) 연전(年前)에 중동(中東)의 한 기자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을 취재하며 만든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예닐곱 살 정도의 한 팔레스타인 아이의 생활이 주된 배경인 그 영상기록의 말미(末尾)에서 필자는 가슴에 소름이 돋는 광경을 접했다. 초등학교 1~2학년에 불과한 그 아이의 천진성은 빨리 열두어 살 정도의 아이로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성장의 욕구는 온전히 자살폭탄테러에 집중되어 있었다. 티 없는 웃음으로 시청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그 아이는 빨리 성장하여 순교자(?)가 되고자 하는 순수한 신앙의 징표들을 온전히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혹독한 폭력은 늘 교육을 그 수단으로 삼아왔다. 그 이유는 교육만이 한 인간의 정신적 존재가치의 설정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정신적 폭력은 그래서 교육의 가치를 왜곡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는 교육 자체에 대한 가치의 왜곡에서 출발한다. 이 오류 위에 교육시스템이 설정되어 왔기 때문에 그 문제들 또한 구조적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어느 존재든 생김새와 기능이란 물질적 측면에서는 다양성을 향해 펼쳐지려는 속성을 가지고 존재의 가치와 본질이란 추상적 측면에서는 하나의 개념으로 수렴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앞모습은 뒷모습과 많이 다르다. 눈, 코, 입을 포함한 얼굴은 머리의 앞부분에 있으며 뒤통수는 머리의 뒤에만 있다. 이렇게 온전히 다른 모습과 기능은 하나의 인간을 이루는 물리적 부분일 때에 가치를 갖는다. 그 다양성 자체가 가치를 갖지는 못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가치적 측면으로 접근할수록 단순해지고 방법적 측면으로 접근할수록 다양해져야 완전체에 가까워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도 이를 이루는 제도들이 다양한 모습일 때 기능을 가지지만 이를 받쳐주는 근본적 제도는 하나의 가치로 수렴될수록 의미가 풍부해진다.

교육은 모든 제도의 인프라이다. 정치제도, 경제제도, 등과 함께 병렬적으로 교육제도가 존재하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가치의 굶주림에서부터 오는 부작용을 경험하게 되어있다. 따라서 교육은 하나의 본질적 가치로 수렴하려는 성질, 즉 물리성이 아닌 추상성에 그 본래의 모습을 체화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여타 사회제도들이 그 방법적 다양성에서 현실적 접목과정이 모색되어야 하고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면 그 높여진 가치 자체에 관한 설정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한 시대, 한 나라에 있어서 교육의 가치수준이 그 국가의 모든 것을 실질적으로 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융합교육(融合敎育)은 사실 교육의 한 방법론이 아니다. 교육은 그 자체가 모든 개념의 근저(根底)이며 인간 존재의 출발점을 설정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교육은 그 용어 내부에 이미 '융합'이란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교육이 가진 다양한 겉모습을 교육의 본질로 착각해 왔다. 따라서 과목이 다양하면 다양한 만큼 더 깊고 많은 교육이 시행되는 것으로 오해해 왔다. 그리하여 등장한 수많은 교과목들이 모두 이행하기 어렵게 되자 이과와 문과로 나누고 예체능을 분리시키고 특기적성과목이란 이름하에 더욱 다양한 과목들로 나누어 왔다. 그리하여 오히려 '공부'를 위해 인간의 본성인 '예술'과목들과 공부를 위한 전제조건인 '건강'과목들을 버려야 한다는 괴기한 개념을 형성시켜왔다. 미술, 음악, 체육, 영어, 수학, 과학, 역사를 구분하는 것은 교육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직업이나 취미 등 삶의 객관적 형태를 추구하는데 유용한 방법으로 교육을 이용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일 뿐이다. 교육은 그저 이들을 본질적으로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서 인간의 존재가치의 높이를 제고하는 이상(理想) 그 자체로 파악하는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각 과목에 부여된 짧은 병렬적 시간단위들에 문제를 푸는 기능을 부여한 것을 수업이라 이름 붙여 놓고 있다. 그리고 그 수업을 통해 '공부'하는 행위가 이행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형태에서는 교사는 남이 정리한 정보들을 전달하는 역할 이외에는 할 수 없으며 학습자들은 그러한 방법을 통해 '교육'으로부터 이탈될 수밖에 없다. 지금 그 모습이 우리나라의 온갖 종류의 교육현장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이다. 우리나라의 교육개혁이 방향을 올바로 잡기 위해 융합교육이란 이름의 교육의 본래(本來)를 현실적으로 찾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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