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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깜부기
풍향계/ 깜부기
  • 동양일보
  • 승인 2019.06.11 1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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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동양일보)

영어의 위력이 농촌에까지 파고들었다. 하기는 농촌의 중장년 치고 고등학교나 그 이상을 마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 영어는 물론 다른 외국어도 꽤 알아서 요즘 젊은이들 간에 쓰는 핸드폰의 외래어약어에도 밝다. 그래서 이 동네 장년들도 우리 고유어에 영어와 한자어를 섞어 쓰는 조어도 만들어 낸다. 그게 곧 ‘깜보디어’ 다. ‘깜’은 ‘까맣다’를 뜻하는 우리말이고, ‘보디’는 영어의 ‘보디(body)’로 곧 ‘몸통부분’을 말하며, ‘어’는 한자어의 ‘어(語)’이다. 그러니까 ‘까만 몸을 뜻하는 말’ 인 것이다. 이건 주식이의 별명인데, 주식인 남들보다 온 몸이 까맣다. 온 몸이라 했거니와 실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얼굴이며 팔뚝이며 다리며가 까맣다. 이는 뜨거운 여름햇볕에 찌들어서이다. 그만큼 남들보다 들일에 억척이라 그렇다.

“주식이 쟤는 아주 들에서 살고 쉬는 걸 못 보겄어.” “그러니께 난닝샤쓰하구 반바지 입은 곳만 빼구 온통 쌔까맣지.” “그치만 우리도 쟤만은 못해도 땡볕 아래서 여름일 하잖여?” “그래도 쟤보단 허옇제. 하여튼 그도 그렇지만 쟤는 특이한 피부여.” “오죽해야 우리가 ‘깜보디어’라 하는가.” “그려 근데, 깜보디어‘보다는 아주 .캄보디아’ 라는 게 워뗘. 발음도 비슷한데다 실제 나라이름이고 건넛산아래의 공장에서 일하는 그 캄보디아 사람들 피부도 주식이마냥 까무잡잡하잖여.” “그것 좋겄다 이참에 ‘깜보디어’ 대신 아주 ‘캄보디아’로 하자구.” “캄보디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지난해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동남아여행 갔을 때 캄보디아로 갔잖여. 그 수도 프놈펜하구 앙코르에 있는 ‘앙코르와트’ 라는 옛 사원을 봤는데 볼만 하데!” “아니, 주식이 별명얘기에 느닷없이 왜 삐딱한 데루 빠져, 여하튼 다시 말하지만 주식인 이제 ‘깜보디어’가 아니구 ‘캄보디아’인 겨. 알었제 들?” “그려, 그려.”

그런데 동네노인장들 간에는 주식일 ‘깜부기’라 불린다. 그의 살갗이 까매서이다.

‘깜부기’란 것이 원래는 ‘깜부기숯’이란 말이 줄어든 것으로, 나무줄거리를 때고 난 뒤에 불기를 꺼서 만든 숯이다. 그래서 까맣다.

곡식에 ‘깜부깃병’아라는 게 있는데, 이는 곡식의 이삭이 깜부기 균에 의하여 검게 되어 깜부기가 되는 병을 말한다. 이 병은 보리, 밀, 옥수수, 조 등의 이삭이나 씨알에 생겨 큰 해를 주는 병이다. ‘깜부기불’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건 깜부기숯 따위에서 불꽃이 없이 거의 꺼져 들어가는 불을 말한다. 여하튼 깜부기는 빛깔이 검은 게 특징이다.

“여보게 주식이 말일세, 그 안에서도 점점 주식이 닮아가데.” “왜, 그 변호사가 신랑 닮아 묵묵이라도 돼 가는가?” “그게 아니라 새댁 적에는 그 헙헙했던 사람이 지금은 한 톨의 양식도 축을 낸다거나 버리질 않고 여투어 둔다는구먼!” “내외는 닮아간다 하지 않는가. 주식이한테로 시집온 지 십여 년이나 넘었는디 안 닮겄어?” “자네 말대로라면 밖에서 안을 닮을 수도 있잖여?” “아이구, 행여 그 알토란 주식이가 헙헙한 그 안을 닮겄네. 삼년 묵은 콩이 싹트길 바라는 게 낫지.” “그려, 주식이 그 사람 얼굴이 여느 사람들보다 검어서 깜부기라 불리지만서두 어디 됨됨이는 깜부기처럼 푸슬푸슬 허술 허술한가?” “자네 말이 맞네. 맞구 말구. 정신이 개운할 정도로 시원스레 거리낌 없이 이 오뉴월 땡볕에도 일 해내는 억척인디. 안 그려?”

정말 그렇다. 주식인 햇볕에 타 깜부기지만 깜부기처럼 곡식의 빈껍데기가 아니다.

“옛날엔 깜부기 참 많었지. 그놈의 깜부깃병은 왜 그리 곡식에 잘 걸렸는지.” “지금은 농약이 좋고 보리나 밀, 조 같은 곡식을 잘 안 지어먹으니까 그렇지 옛날에 우리 어렸을 적엔 참 깜부기 흔해서 그거 솎아내느라고 혼났잖아.” “그 깜부기 우리 어려서 멍청 먹었지 왜.” “그럼, 그럼, 입안이며 입술 언저리가 까맣두룩 먹었지. 그게 뭐 맛이 있구 영양이 있는 거라구.” “영양이 있어 그랬나. 먹을 게 없구 깜부기 퇴치 차원에서 그랬지.” “바람이 불거나 심술 맞게 얼굴에다 훅 불면 얼굴이 온통 깜둥이가 됐지 왜. 지금 까만 주식이 얼굴처럼.”

캄보디아, 깜부기 별명을 가진 주식은 아내와 함께 오늘도 뙤약볕에서 밭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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