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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소가 사람의 목숨을 구하다
풍향계/ 소가 사람의 목숨을 구하다
  • 동양일보
  • 승인 2019.06.1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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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손근호씨는 국민보도연맹 옥녀봉 집단희생자 유족이다. 그는 6·25 당시 17세로 서울의 영등포중학교 야간을 다니다가 모든 꿈을 접고 1950년 6월 29일 저녁 사리면 하도리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다음 날 아침 둘째 형님댁을 방문한다.

갓 스물 겨우 넘긴, 형님 부부는 딸을 하나 낳아 10개월 정도 되었는데 형수님을 닮아 너무 예뻐 보였다. 윗방을 살펴보니 일본으로 보국대 노무자로 갔다가 가져온 아코디언과, 파리와 퉁수 등이 놓여 있었는데 그 옆에 국민보도연맹증이라는 낯선 수첩이 눈에 띄었다. 이 수첩에는 다섯 칸의 줄이 그어져 있고 매일 지서장의 확인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도민증 대신 발급된 신분증이었는데 보도연맹원의 관리감독과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는 형님께 왜 이런 단체에 가입했느냐고 따지듯 물었더니 비료를 준다고 하여 단체에 들었다고 하였다. 비료는 겨우 수입에 의존하는데, 어떻게 비료를 줄 수 있느냐며 거짓말이니 속지 말라고 애타게 말렸으나 매일 아침 출근 도장만 찍고 왔고, 가끔 저녁에 2시간 정도 몇 번 교육을 받았을 뿐이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셨다.

괴산 사리지역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분들이 6~7명 정도 되는데 대부분 레닌의 맑스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들이 좌파사상을 주도하였는데, A씨는 6·25 발발 당시는 공주 형무소에서 복역했다가 행방불명이 되고, B씨는 서대문형무소 복역 후 출소하였으나 비행기 폭격으로 사망하는가 하면, C씨는 월북하여 생존하는 등 공산주의 전력자들이 정리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의 맑스 사상 전파의 휴유증이 지역민에게 고스란히 재앙으로 남게 되었다. 좌익단체에 가입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따라서 보도연맹 가입자 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사리지역의 회원 수가 80명을 상회하였다. 형님의 경우는 좌익단체 활동을 한 사실도 없는데 비료를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보도연맹원이 되어 열성을 보이는 것이었다. 기를 쓰고 말렸더니, 우리 동네도 10여 명이나 되니 며칠간 짬을 보겠다며 2~3일 도장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를 거둬들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1950년 7월 8일 지서에서 보도연맹 총소집 통보가 왔다. 형님은 우등생이 학교 가듯 지서로 달려갔다. 큰 형님의 친구분이었던 오 형사는 점검을 하더니, 형님을 불러 세운 것이다. 그리고 지서에서 제일 먼 거리에 있는 송오리에 가서 불참회원을 데려오라고 지시하였다. 일테면 도주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형님은 송오리로 달려갔다. 송인교씨는 소가 없어져 들로 찾으러 가고 없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고삐 풀린 소가 주인의 생명을 건져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형님은 겨우 한 사람을 데리고 왔노라며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미안해하며 승차하였다고 한다. 저녁나절 되어서야 트럭은 출발하였다. 80여 명의 연맹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증평야조장으로 끌려가 예비검속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7월 9일 옥녀봉으로 새끼줄로 굴비 엮듯 줄줄이 뒤로 묶여, 말 한마디 못 전하고 희생되고 말았다. 하도리에서는 10여 명의 회원 중에서 6명이 끌려가 5명이 희생되었다. 끌려갔던 박씨는 천운으로 총에 맞지 않았다. 옥녀봉 살육장에 어둠이 내릴 때를 기다렸다가 800여 명의 시체 더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7월 12일 아버님과 셋째 형님은 연락을 받고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형제들은 손재주가 있어서 면에서 가마니짜기 대회에서 매번 우승하곤 하였다. 그런데 형님 짠 가마니를 풀어 시신을 운구할 들것을 만들고 있는 아버님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지금 생각해도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 밀려온다. 사망한 지 나흘이나 지났으니 시체들이 부패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체들은 뒤로 묶인 채 구덩이에 일렬로 겹쳐 쌓여 있었다. 어머님은 평소에 무명적삼을 지으실 때는 꼭 붉은색 줄무늬를 넣곤 하셨던 터라 어렵지 않게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형님은 30리 길을 들것에 실려 고향 선산으로 돌아왔다. 형수님은 어린 딸을 안고 강물같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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