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희 청주시흥덕구 가족관계등록팀장

조은희 <청주시흥덕구 가족관계등록팀장>

(동양일보) 어릴 적 아카시아 꽃, 진달래꽃, 찔레 순을 따먹으며 놀던 아름다운 고향마을! 손이 새카맣도록 공기놀이를 하고 자치기를 하며 평화롭게 놀던 고향마을! 봄이 되면 동네 산에 지천으로 돋아난 나물들이 맛난 비빔밥의 재료가 돼줬던 곳! 이제 그곳이 ‘문명’이라는 미명 아래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외지인들이 고향 마을을 조금씩 좀먹어 들어오더니 이제는 이웃 동네 주민들이 조상 때부터 살아왔던 터전을 내주고 곧 살던 동네를 떠나야만 한다고 한다. 커다란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원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산업단지뿐 아니라 폐기물 매립장도 들어서고 이미 공사가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동네 어귀에 붙어 있던 ‘폐기물 매립장 결사반대!’ 현수막과 동네 이장의 이마에 둘러졌던 빨간 띠는 힘을 잃었고,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여기저기 들어서는 낯선 공장은 ‘우리 동네가 이제 우리 동네가 아니고 남의 동네로 완전히 망해가는구나’라는 생각만 들게 한다.

지난주 고향에 들렀더니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지난해 공들여서 조상들의 묘를 한곳으로 이전해 마련한 납골당도 산업단지에 내주고 다른 땅을 물색해 이전해야 한단다. 벼농사도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시원섭섭해 하셨다. 자식들이 제발 농사짓지 말라고 성화를 해도 먹히지 않았는데 우리 논도 산업단지 부지에 포함된다 하니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접게 된 것이다.

살아생전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 고속도로가 건설되니 동네가 발전해 좋고 나중에는 그 고속도로가 강원 동해까지 연결돼 하루 만에 회를 먹고 돌아올 수 있어 세상 참 편리해질 거라고 좋아하셨는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제는 고향집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고속도로에 차 다니는 소음으로 신경이 쓰인다.

교통의 발달이 대도시로의 수송을 편하게 만들면서 이곳저곳 들어선 공장들이 고향을 송두리째 빼앗으리라고는 아버지도, 나도, 동네 사람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최근에도 고향 앞산에 중장비 소리가 요란하고 푸른 숲 대신 벌건 황토 흙이 드러나더니 어느새 또 하나의 공장이 뚝딱 세워졌다. 진달래꽃 따먹고 송아 따먹으며 놀던 빤히 보이던 그 산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후죽순 들어서던 공장들이 이제 우리 집 코앞까지 점령한 것이다.

이들 공장은 50년 이상 부족함 없이 써왔던 우리 집 맑은 지하수를 고갈시켰다. 전에는 목이 마르면 수도꼭지를 틀고 벌컥벌컥 시원하게 그대로 마셨던 지하수였는데 이제는 어머니께서 수돗물을 끓여 드셔야만 하고 고향집을 방문할 때마다 생수를 사 가거나 정수기 물을 받아 가서 마셔야 한다. 형제자매가 돈을 모아 고향에 전원주택을 지어서 어머니가 노후를 편히 보내실 수 있게 하자던 꿈도 물거품이 돼 버렸다.

이 기막힌 이야기를 하면 몇몇 사람은 보상받으면 좋은 게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직도 사당에 제사를 모시는 대종손인데도 우리 앞으로 된 논 밭떼기 하나가 없다. 죄다 조상(종중) 명의로 돼 있어 보상 관련은 종중의 총무가 알아서 할 일이며 우리에게 작은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미지수다.

앞으로 연로하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예전의 흔적이 사라진 그곳에 발길을 돌리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제2의 고향으로 어디에 똬리를 틀까? 맑은 물이 흐르는 괴산 청천 쪽으로 돌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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