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욧카이치대학(四日市大學) 명예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서론

일본에서 2020년에는 ‘초고령화’ 사회가 출현된다고 한다. ‘고령화’의 지표는 65세 이상의 노년인구를 총 인구로 나눈 수치로 그 수치는 10.3%(1985년), 16.3%(2000년)으로 추이하고 2020년에는 23.6%이 된다. 이 2020년의 수치는 거의 4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의 고령자가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현상은 출산율이 감소되고 수명이 늘어나는 것으로 일어난다. (우츠미 요이치로内海洋一郎 편저, <고령자사회정책高齢者社会政策> 제1장, 미네르바서방ミネルヴァ書房, 1992) 이른바 ‘저출산 · 고령화’의 현상이 이렇게 일어난다.

일본에서는 흔히 ‘신변의 일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일도 할 수 있는 세대’를 가리켜 ‘전기 고령자(65세∼74세)’라고 부르고 ‘신변의 일 처리가 힘들어지고 노동도 거의 안 하게 된 세대’를 ‘후기 고령자’(75세 이상)라고 부른다. (<고령자사회정책> 30쪽) 이렇게 ‘분류’된 ‘고령자’는 주로 의료, 복지, 사회정책의 대상으로 파악되는 경향에 있다. 물론 뛰어난 고령자의 존재는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개별적인 것이며 고령자가 집단으로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전통적 문화행사의 부활· 계속에서 고령자 집단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이 집단 없이는 몇 가지 전통행사의 집행이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현실은 다른 지역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중시되지 않고 있다. 또 노인과 그 반대 극에 있는 어린이와의 구조적 관계에 대해서는 1980년대 후반기에 가마타 도지(鎌田東二) 교수의 <옹동론(翁童論)>(新曜社)을 비롯하여 일련의 저서가 출판되었지만, 그 이후 그 철학적인 연구가 널리 이루어졌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E. H. 에릭슨(1902-1994)은 80대에 <노년기의 적극적인 삶>을 출판했다. 다나카 다카히코(田中孝彦)씨에 의하면 에릭슨은 이 책에서 노년기의 사람들의 ‘고립화’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하고’ ‘노년기의 사람들과 다른 세대의 사람들과의 활기찬 관계를 되찾고 만들어내는 것이 미국사회의 근본적으로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으며, 노년기의 사람들은 그러한 활기찬 관계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위前衛>, 2019년 4월호)

이 짤막한 글에서는 노년을 철학의 과제로 보고 동시대를 사는 다른 세대와의 교류를 통해서 인간적인 사회의 재생과 깊이 연관되는 주요개념은 무엇인가, 또 그 철학구조에 대해 나의 체험지(體驗知)를 바탕으로 생각해보고 싶다.



1. 노년기에 관한 두 가지 파악

(1) 노년기에 대한 부정적인 파악

노년기는 현실적으로는 부정적으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고령자’의 ‘비생산성’과 ‘병’ 등이 가족과 사회에게 많이 부담이 된다는 의식을 낳기 때문이다. 지배자는 자기에 대한 비판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고령자 무용론’을 정치적 차원어서도 실행한다. 고령자 노인을 마을에서 동떨어진 산중에 산 채로 갖다 버리거나 살해하거나 하는 ‘현실’을 배경으로 한 ‘민화’는 일본의 ‘우바스테야마(할머니를 산에 유기하기)’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도 옛날부터 많이 볼 수 있다. 현대의 ‘저출산 · 고령화’를 ‘국난(國難)’으로 보는 시각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한 부정적 실감은 오늘날 장년· 청년이나 손자세대뿐만 아니라 많은 노년들에게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의식은 유용성· 생산성을 으뜸가는 가치로 삼는 사회구조로부터 생기고 지배자는 그 의식을 자기의 지배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감각의 존재에 대해 모든 세대가 만족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치매증을 앓고 아들 부부와 손자를 ‘괴롭힌’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T군(손자)이 쓴 ‘글짓기’의 한 구절을 나와 동세대의 다나카 다카히코 씨는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T군이 앞의 글을 지은 지 3개월로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의 일을 T군은 다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할아버지를 납관할 때 아버지가 펑펑 울면서 할아버지를 안고 관 안에 넣었다. 그랬더니 나도 함께 울었다. 형도 어머니도 할머니도 아저씨들도 아주머니들도 펑펑 울었다. 나는 할아버지보다 아버지가 우는 것을 보고 울었던 것 같다.’”(다나카 다카히코 <지금 어린이론과 노년기론을 결부시켜서 심화시키다> 205-206쪽 <전위> 2019년 4월호)

여기에는 치매증 때문에 만년에는 모두를 ‘괴롭힌’ 할아버지가 죽은 슬픔을 공유하는 것과 물심양면으로 자기를 떠받쳐 주어야 될 존재로서의 ‘아버지’의 동요에 의해 T군의 슬픔이 증폭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귀찮은 자· 쓸모없는 자’로서의 고령자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물을 상호관련성으로 파악하는 시점과 고령자가 가지는 인간적 매력을 수용하는 시점은 결여되고 죽음의 슬픔은 감각 차원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 과연 ‘갖다버려야 할 쓸모없는 자’로 고령자를 보는 시각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T군이 울었던 것은 ‘아버지’가 감각 차원으로밖에 ‘할아버지’의 죽음을 파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승려로서 일상적으로 ‘죽음’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나에게는 인간의 죽음, 특히 경험이 풍부한 고령자의 죽음은 슬픔을 수반하면서도 슬픔을 뛰어넘는 임팩트를 준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것은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노년세대가 현실적으로 다른 세대를 이끌어주는 문화적, 사회적 역할을 맡으면서 일상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T군 주변에는 그러한 적극적인 임팩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죽음이 주는 최대의 임팩트는 주변 사람들에게 주는 ‘인간적 각성’이다. 이것을 사람의 죽음을 통해 받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기르는 문화와 사회시스템이 반드시 존재해야 된다. ‘구미식 근대’가 세계를 석권하기 전의 시대에는 ‘인간적 각성’을 일으키는 토착문화로서 종교와 결부된 민화, 그리고 그 ‘이야기꾼’과 ‘청중’을 보장하는 사회시스템으로서의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노년세대와 손자세대에는 지적· 문화적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동체도 역시 문화의 계승에 의해 강화되고 존속되어 왔다. 사람들은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키워지고, 또 타자를 위해서 사는 가운데에서 타자와의 상생과 개인의 존중을 병존시켜왔다. 민화는 공통적으로 고령자· 노인은 갖다버려야 할 귀찮은 자가 아니라, 사회에 있어서 인간으로 사는 길을 교시해 주는 필수불가결의 존재라는 것을 풍부하게 설명하고 있다.



(2) 노년기에 대한 적극적 파악과 민화의 세계

노년기의 인간에는 배울 만한 적극적 측면이 있다. 이것을 가르쳐주는 민화가 아시아에는 많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생산성이 없고 쓸모가 없는 인간으로 ‘노인’을 자리매기는 데서부터 시작하면서 그것을 극복할 길을 설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민화인 ‘우바스테야마’도 쓸모없는 나이든 어머니를 국법에 따라 깊은 산속에 갖다버리려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산길을 걷는 동안 어머니는 갈림길마다 작은 가지를 부러뜨리고 있었다. 아들은 그 것에 대해 따지지 않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고 버리는 장소에서 어머니를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머니, 중간에서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있었지요. 자기가 마을로 돌아가는 안표로 삼으려는 거였지요.’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마을로 돌아갈 생각은 없다. 여기서 죽을 마음을 먹고 있다. 도중에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던 것은 네가 갈 길을 잃지 않게 안표를 해놓은 거야.’ 이 말을 듣고 아들은 다시 어머니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와 오두막집에 남몰래 숨겼다.

얼마 후 이웃나라에서 사자가 선전포고하러 왔다. ‘가까운 시일에 이 나라를 쳐 멸망시키겠다. 그러나 한 가지만 살 길이 있다. 그것은 재로 줄을 꼬아서 그것을 나에게 보이는 것이다. 일주일 뒤 다시 이 성을 찾아올 테니 그때 재로 만든 줄을 보여라. 못하면 바로 이 나라를 몰살시킬 것이다.’ 강력한 이웃나라와 싸우게 되면 틀림없이 패배하는 것을 알고 있는 영주는 대단히 난처해하고 백성에게 재로 만든 줄을 바치도록 명을 내렸다. 그것을 알고 깜빡 놀란 아들은 숨겨놓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짚을 가져다가 그것을 소금물에 담근 후 말려서 새끼를 꼬아라. 그러고 그 새끼줄을 불태우면 무너지지 않는 재의 줄을 만들 수 있다.’ 그 말대로 따라하고 기일에 영주에게 바쳤다. 그 덕분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국법을 어긴 것으로 사형을 각오하면서 ‘재의 줄’을 바친 아들에게 영주는 감사하면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노인을 갖다버리는 법을 철폐했다. 그리고 노인을 소중히 하게 된 그 나라는 크게 번성했다.

이 이야기는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존재를 부정당한 노인이 ‘지혜(智慧)’에 의해 아무도 풀지 못했던 어려운 문제를 훌륭하게 풀고, 그것에 의해 나라와 사람들을 살려주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지혜’는 서양근대를 특징짓는 자기중심주의를 합리화시키는 ‘이성’과 다른 것이다. ‘지혜’는 자기중심적으로 사물을 보는 각도를 바꾸어주는 ‘활동’이다. ‘재를 꼬아 줄을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는 한 그것을 실현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소금물에 담근 짚을 말려 그것으로 줄을 꼬아서 그것을 태우면 무너지지 않는 ‘재의 줄’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활동이며 이것은 현실에 마주 대하면서 도망치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계속해서 인생을 걸어감으로써 누구나 몸에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식’의 노력만으로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타자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자기를 변혁시키는 것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자기 틀이 깨지게 된다. 그 ‘깨짐’은 외부성(外部性)의 ‘촉구’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 힘을 ‘영성’의 활동으로도 부를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종교와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이다.



2. 노년철학과 영성의 활동

노년에 상징되는 것은 살아 있는 지혜의 활동이다. 이 지혜는 단지 자기가 주체적인 노력을 쌓아올리는 것만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외부성으로서 자기변혁을 촉구하는 ‘활동’으로 일어난다. 또 그 ‘활동’은 도피하지 않고 현실과 마주 대하고 오랜 세월 동안 그 노력과 경험을 거듭하는 가운데서 받게 되는 것이다. 지혜가 나이를 쌓는 것, 연장(年長)임과 결부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구조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인도의 민화인 ‘세 명 중의 연장자’이다.

(1) 인도민화 ‘세 명 중의 연장자’가 의미하는 것

이 민화는 기원전 250년경에 인도에서 집성된 불교설화 ‘자타카 이야기’에 실린 것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히말라야 산맥의 움푹 들어간 곳에 한 그루의 큰 바니안나무가 있었고, 거기에 자고새, 원숭이, 코끼리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때가 지나서 셋의 생활은 서로 엇갈리게 되었다. 자고새는 아침 6시에 일어났는데 언제나 하루 종일 자고 있는 원숭이는 ‘선잠’을 잘 수 없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원숭이의 불만을 들으면서 언제나 밤새우게 된 코끼리는 잠잘 틈이 없어서 신경질 나게 되었다. 자고새는 아침 식사로 시작하는데, 원숭이는 저녁부터 먹고, 코끼리는 점심부터 먹기 시작하게 되면서, 공동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어떻게든 이러한 현실을 빠져 나가고 싶어 한 셋은 서로 상의한 끝에, 누가 모두를 이끌 수 있는 연장자인지를 정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늘 같이 살아온 셋은 누가 연장자인가를 결정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광장에 서 있는 바니안나무를 공통의 기준으로 정했다. 즉 자기의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 이 나무가 어느 정도 높이었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셋의 나이를 밝히려 한 것이다. 코끼리의 최초의 기억은 바니안나무가 새끼 코끼리였을 때 그 위를 넘어가자 나무 꼭대기 잎이 자기 배를 닿아서 간지러웠다는 것이었다. 원숭이의 기억으로는 새끼 시절에 바니안나무에게 웅크리면 꼭대기의 잎이 자기 입술과 맞닿았다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원숭이가 더 작았던 바니안나무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코끼리보다 원숭이가 연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자고새는 어떤가? 코끼리와 원숭이에게 질문을 받은 자고새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 한 그루 큰 바니안나무가 더 있었어요. 나는 그 열매를 자주 먹었지요. 그 씨앗을 여기로 가져와서 똥을 쌀 때 함께 떨어뜨린 것이 바로 나무에요. 그 씨앗 중 하나에서 이 바니안나무가 자라게 된 거에요. 나는 이 나무가 나오기 전부터 이 나무를 알고 있어요.’

이 말을 듣고 원숭이와 코끼리는 자고새가 가장 연장자임을 알고 자고새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셋은 원래대로 서로 어울려 사이좋게 살게 되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른다. ‘태양은 언제나 아침에 눈뜬다. (그래서 태양은 ‘구애됨’ 없이 자유로운 것이다) / 태양은 언제나 밤에는 잠든다. / 우리도 그렇게 하자. / 구름도 비도 땅도 / 다름 아닌 이 바니안나무도 자연의 법을 따르고 있다 / 그러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자.’

이 이야기에서는 ‘지혜’가 혼란을 해결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그것이 연장자의 능력과 동일시되고 있다. 여기서 ‘지혜’는 모두가 승인하는 공통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기준’도 처음에는 눈으로 보이는 ‘바니안나무’이며, 이 나무는 아득한 옛날부터 ‘성스러운 것’으로 숭배되고 있다. 현실의 나무이면서 성스러운 것이기도 하는 ‘이중성’을 가진 이 나무는 태양에 의해 길러진다. 따라서 바니안나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그것을 기르는 ‘태양’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활동’의 보편적 상징으로써의 ‘법(dharma)’에 다다르게 된다. 그럼 어떻게 인간은 이 지혜를 획득하는가? 그것은 영성의 ‘활동’에 의해 가능해진다.



(2) 영성과 지혜

지혜는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는 ‘프라즈냐prajñaa’라고 부르고 그 의미는 ‘안탈 드르스티antar-drsti’(속을 살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내면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거기에는 항상 자기변호(자기중심주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을 보기 위해서는 육체적 유한적 자기를 뛰어넘어 새롭게 태어난 자기로서 다시 육체적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 힘으로 자기를 뛰어넘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관념 속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참된 자기초월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당시 ‘교토학파’ 등이 외친 ‘근대의 초극’의 논리와 같다. 육체적· 개별적 자기를 뛰어넘은 비육체적인 새로운 ‘자기’가 다시 육체적 ‘자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외부성(外部性)으로서의 초월적 절대자의 ‘활동’인 ‘부름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것은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권상卷上)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아난다(阿難陀)가 구체적인 개체(석존釋尊)를 이중화(二重化)시켜 절대자(아미타불)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 ‘자기초월’을 이룬 것에 나타나 있다. 종교인이라면 개별적인 오키나와(沖繩) 사람들에게 ‘절대자’의 부름소리, 즉 ‘국책은 절대적인 것입니까? 민주주의를 짓밟는 불합리한 헤노코(辺野古) 기지건설을 허용할 수 있습니까? 그래도 당신은 태연하게 있을 수 있습니까?’라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종교인이 아닌 사람이라면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속 목소리’ 즉 ‘인간적이고 싶거든 평화를 추구하거든 전전(戰前)과 같이 전쟁 수행의 <국책>과 맞서 당신은 자기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라’라는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목소리를 마음의 귀로 듣고 태어난 ‘새로운 자기’가 낡은 육체적 자기로 돌아가는 것으로 자기변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며 영성의 활동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다. 영성(靈性)이라는 말은 일본의 불교도에게는 낯선 말로 ‘부처의 본원력(本願力)’이라고 말하는 편이 이해하기 쉽지 아닐까 생각된다. ‘본원력’이란 항상 진실을 등지고 있는 우리들을 한사람도 남김없이 진실로 돌리게 하고, 참된 인간으로 키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항상 활동하는 부처의 구제력(救濟力)을 의미한다.

영성에 대해서는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가 전쟁 중· 전후에 <일본적 영성(日本的靈性)>(1944), <영성적 일본의 건설(靈性的日本の建設)>(1945), <일본의 영성화(日本の靈性化)>(1947)에서 자세하게 논하고 있다. 스즈키 다이세츠의 ‘영성론’에는 인간과 절대자의 약동적(躍動的)인 상호 관계성이 결여된 정토진종(淨土眞宗)에 대한 비판, (국가)신도 비판, 평화건설에 있어서 영성의 역할에 대한 지적에 관해서는 오늘날에도 평가할 만한 것이 있다. 하지만 ‘자기초월’에 대해서는 외부성으로서의 타자가 없기 때문에 참된 자기초월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그 자기초월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러한 ‘자기초월’을 이룬 인간으로서의 ‘묘호인(妙好人; 특별히 배운 것이 없으면서도 높은 신앙적 경지에 도달한 재가 불교인<특히 종토진종>)’에게 사회적 시각이 결여된 것도 관념 내부의 ‘자기초월’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러한 문제점의 극복은 이미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나 1980년대에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와 투쟁을 벌인 상황신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 한국의 동학(東學) 운동부터 현대에 이르는 영성의 심화를 공부하는 것으로, 일본에서도 다이세츠 영성론의 비판적 극복이 가능할 것이다.



결론

노년철학의 핵심은 지혜이다. 그 지혜는 모든 문제를 해결시킬 지침을 주는 것이다. 지혜는 상호관계성을 기축으로 한 인식주체, 과학· 학문의 인간화라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지혜를 모든 기초에 둘 때, 원전 폐지, 자연과의 상생, 사회적으로 인간의 개성 존중과 연대, 평화 실현의 길이 열린다. 지혜는 풍부한 인생경험을 겪는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혜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숙성(熟成)이 필요하다. 따라서 노년과 지혜가 결합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리하여 생긴 지혜는 자기 속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로 확산된다. 그것을 맨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손자 세대’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세계에서는 저녁식사 후 노인세대가 그들에게 민화를 들려주는 것으로 지혜가 계승되어 왔다. 또 그러한 이야기를 그들이 요구했다. 그 지혜는 아이들 속에 머무르지 않고 아이들은 지혜를 사회 속에 확산시킨다. 지혜를 이어받은 어린이 세대가 탐욕스러운 영주의 불합리한 요구를 멋지게 철회시켜 아버지를 구해낸 이야기를 한국 민화의 ‘겨울 산딸기와 돌의 배’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전통이 한국의 ‘촛불시위’를 생각해냈다고 전해지는 중학생에게도 계승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럼 지혜의 획득은 어떻게 가능해지는 것일까? 그것은 지적 인식(과학적 인식)이 뛰어넘을 수 없는 벽에 맞부딪쳤을 때, 외부성으로서의 ‘타자’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영성의 활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민화이며, 영성의 활동은 여러 종교에서 이론화· 체계화되고 있다. 영성의 활동에 의해 지혜가 얻어짐과 동시에 타자에 대해 제의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것은 지혜를 얻은 것에 대한 ‘보은’의 행위이다. ‘은혜’는 산스크리트어의 ‘구리타즈냐(해준 것을 안다)’를 중국어로 번역한 말이며 은혜를 보답하는 행위가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 일련의 ‘연결고리’의 동작 주체가 되는 것이 바로 ‘노인’이다. 노년철학의 구조는 이렇게 가리킬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체험적으로 얻은 사상이기도 한다.

구미식 근대의 모순이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비구미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안에 완전히 빠져들고 있다. 노년철학은 이 현상을 타파하는 데에 가장 유효한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번역: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야규 마코토 柳生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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