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박희팔 논설위원 / 소설가

(동양일보) 경로당에 초로의 할머니들이 또 모였다. ‘초로의 할머니들’ 이라 한 것은, 82세 이상에서 98세까지의 할머니들 넷은 이제 나이가 연만해서 경로당까지의 출입이 힘에 버겁다 하면서 안 나오고 있으며, 65세에서 80세 미만의 할머니들은 활동에 지장 없어 경로당 출입을 할 수 있어 나오니 이들을 연만한 할머니들에 비해 아직은 젊은 축의 할머니들이라는 말이고, ‘또’ 라고 한 것은 그만큼 자주 경로당엘 나온다는 뜻이다. 일주일에 나흘 아니면 닷새는 나오니까. 점심 임박해서 와서는 밥이나 국수를 해먹고 오후 서너 시까지 한 패는 얘기장단, 또 한 패는 고스톱을 치다가 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머릿수가 일고여덟은 된다. 동네에 또래할머니들이 더 있지만 남의 집 수박하우스며 삼밭 일에 끌려 나가고, 자식들 농사일을 거드느라 못 나오는 이들도 있어 평균 잡아 그렇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들은 이 경로당 나오는 날 중 하루를 잡아서는 그날 할 얘깃거리를 정해서 돌아가며 허심탄회하게 한 마디씩 한다. 오늘이 바로 그날인데 이야깃거리는 기(氣)에 관한 것이다.

“우리 손자 놈은 요새 기가 나서 우쭐우쭐 대는데 가관여.” “왜, 핵교에서 셤을 잘 봤는가 보지 그리도 기세가 오르고 의욕이 넘치는 거 보믄. 우리 집 손녀딸은 요새 기가 팍 죽었는디.” “그 집은 또 왜 그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냥하게 웃으면서 기를 피고 다녔는데.” “누가 아니래 저 집하고 반대로 핵교 셤을 잘못 봤는지.” “듣자 하니께 참 기가 차서 죽겄네. 애들이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허구 헌 날 그래 기가 넘치고 기가 꺾여 있을라구.” “그려, 기가 등등할 때는 잘 다스려 주고 기가 꺾여 있을 때는 잘 북돋워 줘야제.” “여보게들 인자 그 기세가 들쑥날쑥하는 애들 얘길랑 그만두고 우리들 얘기나 혀.”

한 할망구의 이러한 말에 모두들 움찔하더니 모두의 시선이 얼굴에 살점 깨나 붙은 유들유들하게 보이는 할매에게 쏠린다. 그 서낭골할매는 젊었을 적부터 육두문자를 잘 써서 주위를 폭소케 하는 일이 잦았다. 할매들이 아직 아주머니 적 어느 날인가, 그러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비실비실 웃음기를 보였을 때, ‘왜, 날라 가는 새의 니노지를 봤나 왜들 푸실푸실 웃는겨?’ 해서 한바탕 까르르 하게 한 일도 있다. ‘니노지’는 당시 젊은 축의 사내들 간에나 한창 쓰던 여자의 그것을 의미했던 은어였던 것이다.

“왜, 몽짱 나를 보는겨, 내 얼굴이 핼쑥해서 기가 허해 뵈는감?” “그 얼굴이 핼쑥해 보인다구, 하도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구먼.” “아녀 잘 봐봐 그런 것 같은데. 자네 요새 영감하구 한자리 보전 안 하제. 그래서 얼굴이 저렇게 쪼그라 붙었지 내 다 알어.” “아니 어짜구 어쨔 그러는 자네는 히마리가 없어 기죽어 있는 자네 영감한테 아직두 찝쩍거린다는겨. 아무리 그리 해도 수그러져 있는 그건 살려내지 못할 걸?” “아니 저 말뽄새 보게. 저게 아무리 할망구라도 아녀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여.” “왜 우리들찌리 있는디 워뗘. 아니들 그려. 지금은 영감 것을 아무리 말아서 비비 꽈두 전에처럼 안 살아나데. 젊었을 적엔 툭 건드리기만 해두 기가 살어서 까딱까딱거렸잖여.” 해서 모두들 한바탕 웃어젖혔다.

아직도 쿡쿡 웃음기를 띠고 있는데 그 와중에 새터 할매가 말머리를 돌리고 나선다. “이 ‘기’라는 게 말여. 돌아가신 우리 시아버님이 그러는데 ‘기운’을 뜻하는 한자어랴.”

맞다 ‘기’는 ‘기운 기(氣)’다. 그래서 한자어다.

“우리말로는 ‘머리악’이랴. 그래서 ‘기를 쓰다’ 하는 걸, 옛사람들은 ‘머리악을 쓰다’ 했다는겨. 그래서 실제로 우리 시아버님은 ‘기를 쓰고 덤벼든다.’ 하는 걸 ‘머리악을 쓰고 덤벼든다.’ 라고 했어.” “맞어, 내도 우리 할아버지가, 사람들이 어떤 일에 의욕이 일거나 기세가 오를 때는 ‘머리악이 나서 덤벼든다.’고 한 걸 기억햐.” “그냥 ‘악을 쓴다.’는 것도 무서운데, ‘머리악을 쓴다.’ 니, 더 강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드는 것 같네. 안 그려 들?”

이에 서낭골할매가 나선다. “내 오늘 이불 속에서 머리악을 쓰고 치근덕거려 봐야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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