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불던 소년, 조선의 음악을 완성하다

난계국악박물관.
옥계폭포.

(동양일보) 초수리의 아침은 맑고 향기로웠다. 임금은 아침마다 약수를 마시며 눈을 씻었다. 오랫동안 한글 창제와 조정의 수많은 일에 매진하면서 악화된 눈병이 조금씩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늦둥이 아들과 함께 뒷산으로 올라가 머루와 다래를 따 먹고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햇살도 눈부셨다. 뒤따라오던 대신의 한 마디에 귀가 솔깃했다. “이곳에 옥이 있습니다. 이는 분명 태평성대의 징조입니다.”

임금은 급히 영동 출신의 박연을 불렀다. 초수리의 옥으로 편경을 만들자고 했다. 그동안 궁궐에서는 각종 행사 때마다 중국 음악으로 연주했다. 이것이 영 마뜩하지 않았다. 우리의 음악(향악鄕樂)이 있는데도 으레 중국 음악(당악唐樂)을 연주하는 것은 국격에도 맞지 않았다.

고심을 하고 있던 중에 옥이 발견된 것이다. 박연에게 여러 서책을 내려주면서 중국과 다른 우리 고유의 악기를 만들고 우리만의 음악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박연은 세종의 주문에 고무되어 조선의 음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제안을 올리곤 했다.

“소리가 영롱하지 않구나. 각각의 소리마다 결이 있어야 하는데 어느 음률은 일분(一分)이 높고, 어느 음률은 일분이 낮으니 어찌해야 할까.” 세종은 초수리의 옥으로 만든 편경소리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래서 박연과 여러 날 밤을 세워가며 악기를 깎고 다듬기를 반복했다. 세종과 박연은 절대음감을 갖고 있었다.

사실 박연은 음악인이 아니었다.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교리까지 역임한 사대부 출신이다. 조부 박시용은 일찍이 대제학을 지냈으며 부친 박천석도 이조판서를 지낸 전형적인 문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런 그가 음악 전문가로 변신한 것은 세종을 만나면서부터다. 세종이 여러 대신들의 면면을 살펴본 결과 박연에게는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음악에 대한 이해력과 분석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음악연구에 몰두토록 했다.

박연은 앉아서나 누워서나 손을 가슴 밑에 얹어서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했다. 입속으로는 율려(律呂) 소리를 놓지 않았다. 밤낮없이 악기를 다듬고 소리를 내며 흥얼거리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한 일(一)자를 10년 쓰면 붓끝에서 강물이 흐른다고 했던가. 10여 년 만에 드디어 우리 음악을 탄생시켰다. 악보를 편찬하고 악기를 만들며 ‘조선의 기준음’을 만드는 대업을 이루었다.

그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 악기를 조율하고 악보를 편찬하기 위해 임금에게 39번이나 상소문을 올렸다. 음악의 중요성을 강조한 배경에는 어린 시절 피리 부는 습관과 무관치 않았다. 효성이 지극했는데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묘를 3년 동안 지키면서 피리 부는 솜씨를 키웠다. 서울로 올라가 피리 부는 광대에게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절차탁마(切磋琢磨). 그 때의 인내와 호기심과 열정이 조선의 음악을 만드는데 기틀이 된 것이다. 아웃라이어(OUTLIERS). 1만 시간의 법칙이다. 한 분야에서 하루 3시간 이상, 10년을 집중하면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인데 박연의 피리소리에 신묘함이 있었다.

박연은 세종 이후 문종, 단종을 모시며 음악을 연구하고 학문장려에 힘썼다. 그렇지만 말년에 세조의 계유정난으로 인해 시련이 시작되었다. 아들 박계우가 세조에게 반대하다가 처형당했다. 며느리는 노비로 전락했다. 박연 또한 죽을 위기를 맞았지만 3조 왕을 모신 원로라는 이유로 파직당하는 선에서 마무리 했다.

박연은 고향으로 낙향했다. 서울을 떠나던 날 지인들을 향해 피리를 불렀다. 조선 최고의 악성 앞에서 사람들은 머리를 숙였고 눈물을 훔쳤다 한강에서 배를 탔다. 흐르는 물은 말이 없었다. 바람도 고요했다. “내가 아니었으며 너는 음악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나 역시 네가 없었다면 우리의 음악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의 말씀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지나온 삶이 무량했다.

고향으로 와서도 피리를 불며 음악을 연구하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우리 음악을 완성하고 더 많은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마음이 괴로울 때는 옥계폭포로 갔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보면서, 맑게 빛나는 햇살과 푸른 계곡을 보면서 피리를 불렀다. 그 때마다 답답한 가슴이 조금씩 뚫렸다. 하늘이 열리고 소리의 세계가 펼쳐쳤다. 그 마음과 그 소리를 닮고자 하는 사람들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소리와 우리의 음악이 나라 안팎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박연의 음악정신은 희망이다. 불멸이다.

■ 글·변광섭 문화기획자, 에세이스트

■ 사진·송봉화 한국우리문화연구원장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