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손근호씨는 17세가 되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형수님은 어린 딸을 안고 강물같이 눈물을 쏟아낸다. 그렇게 환한 웃음을 달고 살던 근세형이 옥녀봉 집단 학살자의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게 맞는 말이다. 부모님과 친지 어르신들은 젊은 며느리의 통곡에 어떤 말도 덧대지 않고 산소를 짓고 계셨다. 아는지 모르는 계란꽃이 형님을 닮은 동그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흔들린다.

4남 1녀 중에서 둘째 형님만 학교를 못 다녔으나, 언제 익히셨는지 한글을 줄줄 읽어 내리는 것이었다. 형님은 매사 도전적이고 끝맺음이 확실한 성품이었다.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형님의 성격은 혼자 깨우친 뛰어난 피리 솜씨에서 엿볼 수 있었다. 동갑내기 이웃의 후득이 형과 앞산에서 피리를 불어 제치면, 그 멋들어진 가락이 절로 들녘에 흥을 넘쳐나게 하는 것이었다. 들에서 일하던 분들은 어느새 춤사위로 그 흥에 화답하곤 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집집이 보국대원으로 강제 차출되는 것을 보고, 형제들의 짐을 혼자 감당하려고 형님은 보국대를 지원하여 홀연히 일본으로 떠나셨다. 아무 소식이 없던 형님은 해방이 되자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의 손에는 아코디언이 들려 있었다. 그동안 피리의 양산도 가락이 아코디언 연주로 바뀌어 있었다. 형님은 늘 도전적으로 내일을 열어가는 진취성을 가지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언제나 성실했던 형님은 농사일에 매달렸다. 동네 사람들은 성격도 밝고 긍정적 형님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런 착한 형님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사촌형이 평등주의다! 뭣이다! 하며 맑스에 대해 얘기할 때는 무감각하던 형님이었다. 더군다나 보국대 노무자로 갔었으니 이런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농사에 효과 100%인 비료 이야기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좌익하는 사람들이 농민단체에 들어오면 비료를 쉽게 구할 수 있다 할 때는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서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그 금비를 준다는 것이었다. 크게 의심할 일이 뭣 있겠는가. 더군다나 지서는 국가기관 아니겠는가. 형님은 서둘러 회원이 되었으며 성실하게 교육에 참석하였다. 교육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매일 아침 지서에 가서 확인 도장만 받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아침마다 운동 삼아 달려갔다 오면 기분도 상쾌하고 밥맛도 돋아났다. 그리고 가끔 저녁에 2~3시간 정신교육을 받는 것도 전혀 부담 없는 일이었다. 단지 그 하얀 요소비료를 뿌리면, 생끗 웃어 보일 논밭의 작물을 떠올리며 교육에 열성을 보여왔던 것이다.

예쁜 형수님을 얻은 스물의 갓 넘긴 형님은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계란꽃보다 더 곱게 웃는 예쁜 딸까지 얻으니, 고운 달빛과 별빛까지 시샘하며 밤마다 초가지붕 위를 맴돌곤 했었다.

슬픔이 강물처럼 흐르는 것과 상관없이 형님의 3년 상이 지나갔다. 그러나 형수님은 어린 딸을 안고 매일 형님 산소를 오르내리며 치마폭으로 눈물을 훔치는 하루 일과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은 겹치는 속성이 있다고 누가 그랬던가! 계란꽃 미소 예쁜 딸을 병으로 잃고 말았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앞에 앉혀 놓고 울며불며 이야기를 풀었다. 형님 내외는 결혼하였으나 미처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예쁜 딸까지 사망하였으니 재가를 하라고 재촉하시는 것이었다. 물론 형수님은 말도 붙이지 못하게 울음으로 대꾸하였다. 5년쯤 지나, 형수님은 재가하셨다. 그 후에도 몇 번인가 산소를 찾았는데, 그 후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70년 가까운 세월이 무심하게 흘러간 셈이다. 그분이 살아 계시면 지금 90을 넘겼을 것이다. 그분은 유족이었으나 유족이 아니다. 그분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무덤 하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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