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 충북도교육청 총무과 주무관

이준기 충북도교육청 총무과 주무관

(동양일보) 티베트어로 ‘인간’이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걷는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이며, ‘삶의 시작’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 ‘걷는다’는 것은 운동과 행복의 시작일 수도 있었겠지만, 1900년대 조국독립을 위해 가시밭길을 걸었던 그분에게 ‘걷는다’는 것은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1909년 융희황제(순종)가 군부 폐지 및 무관학교 폐교 칙령을 발표함에 따라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이셨던 그 분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합니다. 1919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에 대한 선언’으로 조선에서 3. 1.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 분은 병을 핑계로 서울로,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됩니다.

이후, 서로군정서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백두산 부근에서 항일투쟁을 하려고 했으나, 일본군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패배에 대한 앙갚음으로 만주지역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킴에 따라, 더 이상의 군사 활동을 재개하지 못하고 연해주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소련군과의 마찰과 내부분열로 인해 다시 자유시 참변을 겪습니다.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사관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소련군에 구속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자신을 쫓아 자유시로 왔다가 참변을 당한 부하들에 대한 미안함과 소련정부를 믿은 것에 대한 후회,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며, 책상의 나무를 씹어 먹을 수밖에 없는 배고픔과 시베리아의 추위를 견딥니다.

1923년 상하이 국민대표회에서 군무위원으로 지명되었고, 1925년에는 정의부(正義府) 무장부대를 지휘하여 압록강 건너 초산, 철산의 경찰주재소를 공격하였으며, 1933년 한국독립군을 이끌고 칭바이호(鏡迫湖) 전투,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를 승리하기도 합니다. 1939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이 되었으며, 1940년 광복군 총사령이 됩니다. 1945년 광복군 국내정진작전 결정을 위해 시안으로 갔으나,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또 다시 눈물을 흘립니다. ‘국내정진작전을 실시하지 못한 임시정부에게 발언권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미군정은 장군에게 광복군 총사령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입국하라” 하였고, 이를 거부하였지만 결국, 1947년 개인자격으로 입국합니다.

지석규, 이청천, 지청천으로 이름을 바꾸며, 평생 독립운동을 위해 걸으셨던 故 지청천 장군의 일대기입니다. 조국의 독립전쟁에 투신을 약속했던 동기생들이 현실에 순응하며 일본에 길들여질 때, 만주와 연해주의 우수리강과 아무르강,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부근의 이르쿠츠크, 치타, 다시 만주의 칭바이호와 간도, 상하이, 난징, 충칭, 시안 등을 걷고 또 걷습니다.

만주와 연해주의 항일세력과 대륙침략을 위해 17만 명이라는 대 병력을 투입하는 일본의 힘을 보고, 창씨개명과 학병 출정을 적극적으로 독려하던 이응준과 육군대학이라는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홍사익과 비교한다면 그분이 걸으신 길은 눈물 가득한 가시밭길이었을 것입니다.

1919년 서울,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부인과 세 명의 자식을 뒤로 한 채, 동기생들이 반드시 자신의 뒤를 쫓아와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김광서(김경천 장군) 선배와 신의주행 기차를 타셨던 그분의 망설임 가득한 첫 걸음이 을지태극연습 기간 내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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