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이경용 전 금강유역환경청장

(동양일보) 정부는 시장에 어느 정도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참으로 어렵고도 복잡한 질문이다. 돌이켜보면 자본주의 역사에서 시장과 정부의 위상은 계속 변해왔다. 국가가 자본주의를 적극 육성하던 중상주의를 거쳐 19세기에는 자유시장 방임주의가 우세했다. 그러나 1930년대 대공항을 계기로 케인즈 경제학의 후원을 받는 정부의 역할이 크게 제고되었다. 그러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며 시장의 역할이 다시 강조되었다. 같은 시대라도 나라에 따라 시장과 정부의 상대적 지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미국과 영국이 시장을 더 선호한다면 북유럽 국가는 정부의 역할을 더 강조한다.

적어도 시대와 국가를 아우르는 시장과 정부의 황금분할은 없어 보인다. 각국이 놓인 여건에 맞추어 최선의 조합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불가피하고 어쩌면 그것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켜야 할 근간은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119조는 둘의 관계에 대해 자유시장을 근간으로 하고 정부가 시장실패를 보완하는 보충적 역할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장의 실패도 문제이지만 정부의 실패도 우려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몇몇 사례를 보면서 정부가 너무 앞서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언론을 통해 사회문제가 제기되면 순식간에 국회도 움직이고 정부는 내가 직접 해결하겠다고 덤빈다. 관련 법령을 만들고, 이를 어기면 처벌하겠다고 윽박지른다. 당장 시행을 앞두고 있는 일명 ‘블라인드 채용법’(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시행령)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이 그렇다.

블라인드 채용이 무엇인가? 사람을 채용할 때 용모, 학력, 출신 지역 등 구직자의 특정 정보 요구를 금지하는 것이다. 이는 청년들의 구직난과 맞물려 국민적 공분을 산 공공기관 불법채용을 근절하기 위해 이번 정부에서 처음 도입하였다. ‘블라인드 채용법은’ 그 동안 공공기관에서 시행하던 것을 민간기업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공공기관들처럼 출신학교·학점 등까지 비공개를 의무화하지는 않았지만 구직자의 특정 신상정보를 요구할 수 없게 하였다. 따라서 기업은 앞으로 구직자에게 직무 수행과 관련 없는 용모·키·체중, 출신 지역·혼인 여부·재산, 구직자 본인 직계 존비속과 형제자매의 학력·직업·재산에 대한 개인 정보를 요구할 수 없고, 이를 위반하면 횟수에 따라 과태료 300만∼500만원을 물게 된다.

정부에서는 이 법의 시행으로 청년들이 공정하게 경쟁하고 능력에 따라 고용되는 문화가 퍼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기업이 자신들의 인재상에 맞추어 사람을 뽑는데 무엇을 물어보는 것까지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기업 입장에서 능력 없는 사람을 뽑으면 회사가 손해를 본다. 당연해 최고의 인재를 선발하려 노력하지 않겠는가. 직무의 성격이나 채용 목적에 따라 구직자에게 요구하는 정보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법으로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정부 역할의 보충성의 원칙을 넘어섰다는 비평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일명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또 어떠한가. 한 벤처기업인의 직장 내 갑질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게 이 법을 만드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동 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괴롭힘을 당한 근로자는 사용자에게 신고할 수 있고, 사용자는 신고를 접수하면 즉각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이 법은 처음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법률에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근로자의 인격에 상처를 주고 자존감을 훼손하는 직장 내 괴롭힘은 근절되어야 한다. 직장은 근로자에게 삶의 터전이자 자아를 실현하는 소중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당한 업무 지시와 괴롭힘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어느 조직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상하복명의 위계질서는 대규모 조직의 근간이다. 서로 눈치 보느라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나 하는 걱정이 든다. 상호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문화운동으로 접근해야 할 곳에 법의 잣대를 들이댄 형국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말이 있다. 눈앞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여 정부와 시장의 관계에 대한 헌법적 가치까지 훼손해서는 안 된다. 시장이 우선이고 정부는 보충적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시장 만능주의도 위험하지만 정부 만능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