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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일본서 새로운 자료 발견
불멸의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일본서 새로운 자료 발견
  • 박장미
  • 승인 2019.07.10 2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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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여자학원전경
김마리아 본과 졸업(두 번째 줄 왼쪽 끝)
김마리아 본과 졸업 성적표
김마리아 고등과 재학 증명
김필례 본과 졸업 성적표
김필례 고등과 졸업 성적표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서 편한 삶을 포기하고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 선생의 일본 유학 당시의 행적을 밝혀주는 새로운 자료가 발견됐다.

격주 월요일자 지면에 ‘재일조선인의 삶 75년’을 연재하는 이충호 박사를 비롯한 정신학원 이사진은 지난 2월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도쿄에서 김마리아 선생이 유학한 학교를 찾았다. 일본여자학원에서 이 박사 일행은 선생의 유학 행적에 대해 알려줄 자료들을 학원 관계자로부터 넘겨받았다.

동양일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김마리아 선생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지면에 싣는다. <편집자>



김마리아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 소래에서 태어난 김마리아 선생은 1910년 서울 정동의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13년 정신여학교로 전근해 수학을 가르치다가 다음 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9년 일본에서 2·8독립선언에 참가하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던 중 일제에 체포·수감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출소 후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1921년 8월 상하이로 근거지를 옮겼다.

독립운동을 국내에 전파하기 위해 2.8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미농지에 베껴 기모노 허리띠에 숨기고 부산으로 들어온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안창호 선생과 함께 개막 연설을 했다. 안 선생은 이때 "김마리아 같은 동지가 10명만 더 있었다면 조선은 독립됐을 것"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김 선생은 이후 미국유학길에 올라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1933년 귀국했다.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잔혹한 고문을 당해 한쪽 가슴을 잃었고 평생 뼈에 고름이 차는 등 지병에 시달렸던 김 선생은 광복을 불과 1년여 앞둔 1944년 3월 13일 52세로 평양기독병원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김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박장미 기자





한국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이 일본에서 유학한 학교를 찾아서

문학박사 이충호



지난해부터 한국여성독립운동의 요람지인 정신여고(1887년 창설)의 이사로 일을 하고 있다. 우리 이사진 일행은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이군식 이사장(정신여고, 서울영광교회 담임목사)을 단장으로 해 지난 2월 7일 도쿄를 방문했다. 공항에 내려 바로 일본여자학원(소재지 : 102-0082 東京都千代田区一番町22−10, 전화번호:03-3263-1711, 1870년 창설)을 찾았다. 이 학교는 중‧고가 한 울타리에 있는 중고일관제학교로 기독교계통의 사립학교였다.

필자는 사전에 자료를 찾아 김마리아 선생이 유학하신 학교인 것을 확인했다. 도쿄한국학교 정교감선생님을 통해 일본여자학원 담당교사인 가지하라 선생과 사전 조율을 충분히 해뒀다.

학교에 도착해 교문에 들어서서 아주 견고하게 지어진 교사를 보는 순간 전통이 있는 무게 있는 학교임을 느끼게 해줬다. 예상대로 학교 소개를 들어보니 도쿄대학에 진학률이 아주 높은 우수한 학교였다.

그간 100년이 지나도록 김마리아 선생이 유학하신 이 학교를 많은 연구자들이 알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이 학교가 현재 중등학교 과정으로 운영되는 학교라는 점이다. 필자는 여러 가지 상황을 확인한 결과(주소지 등) 이 학교가 김마리아 선생님이 유학한 학교임을 확신했다. 담당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1920년(김마리아선생이 귀국 후 1년 뒤)에 일본여자대학이 설립되자 대학과정이 그곳으로 이관됐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간과하고서는 김마리아 선생님의 유학학교를 찾을 방안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일본여자대학에서 선생의 흔적을 찾고자 했지만,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엄청난 행운을 가졌다. 2.8독립선언 100주년 행사에 참석하는 덤으로 김마리아 선생님의 유학 행적에 대해서 소상한 내용을 새롭게 알게 됐고 선생에 대한 새로운 자료들을 가지하라 선생에게 넘겨받았다.

나는 이 자료들을 중심으로 김마리아 선생님 75주년 추도예배(3월 13일) 후 기념 논문발표에서 소상히 발표했다. (<편수의 뒤안길> ‘한국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그의 삶이 남긴 자료를 찾아서- pp.26~56. 2019.3. 게재).

우리가 가져온 새로운 자료들만 간단히 소개해 보기로 한다.



<박스처리>

● 여자학원 안내 책자

● <여자학원의 역사>(女子學院の歷史)

위의 자료 382쪽에 여자학원에서 확실한 조선유학생으로 졸업한 사람은 7명이었다.(김필례 1913년 본과 졸, 1916고등과 졸), 김마리아(1917년 본과 졸- 이하 같음), 한소제(1919년), 윤숙경(1919년), 박경희(1921년), 안준담(1924년), 한홍제(1927년).



● 1917년 3월 본과 졸업 성적표(김마리아)

● 女子學院 廣報 2005년 1월 (NO.60), 창립기념일집회(창립 134년)

2004.10.25.

- ‘김마리아와 여자학원’이란 제목으로 게재돼 있음.

● 女子學院 廣報 2013년 1월 (NO.76) (학원 자료실 梶原惠理子의 글)

- 大島孝一 원장시대(196~1980)의 이야기 중

아이덴티티를 확립하자는 김마리아 선생의 말을 인용해 원장(교장)은 학생지도에 자주 사용했다는 내용.

●上野夏子(우에다나츠)선생의 정신여자학교 근무 내역



1914.3.26. 전과 졸업을 하고 정신여자학교에 근무한 기록이 1915.3, 1916.3, 1917.5, 1918.7월 발행한 동창회지에 남아있음. 주소가 정신여학교 내라고 기록되어 있음.

귀국할 당시에 정신여학교 학생들로부터 기증받은 감사장 ‘정신여학교 학생일동’(비단에 놓은 자수)을 그의 딸이 보관하고 있다가 2002년 9월 학교에 기증했음.

● 大正 7년도 동창회지(대정8(1919) 8월 간행)의 ‘그리운 우리 반 친구들에게’ : 김마리아에 대한 기록을(pp.31~32) 당시 서울에서 동창인 야마자와(山澤)지도세가 1919년 4월 10일 밤에 기록한 내용.

●김마리아 선생의 고모이자 정신학원 교장이었던 김필례 선생에 대한 자료도 확인.

-대정2(1913)년 본과, 1916년 고등과 졸업사진(김필례 선생) 및 성적표

-김필례 선생님(84세)의 오시마(大島)교장에게 쓴 편지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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