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

이석우 시인

(동양일보)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기 2년 전부터 손근호씨는 영등포 중학교 야간부에 다니고 있었다. 낮에는 영등포 경찰서 경무과 사환으로 일하며 온통 지구를 가슴에 품은 양, 큰 포부를 깃발처럼 펄럭이며 야간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순식간에 17세 소년의 보랏빛 꿈을 동강 내고 말았다.

한국전쟁이 터진 지 이틀 뒤인 1950년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이미 대전으로 피신하였다. 밤 10시가 되자 대통령의 떨리는 목소리의 녹음 방송이 KBS 제1라디오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빠른 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 자 한다.’

그러나 180만 서울시민은 대통령의 ‘좋은 소식’을 들은 지 다섯 시간이 채 못되어 둥지 잃은 새처럼 파닥이기 시작하였다. 6월 28일 2시 30분 하늘로 치솟는 불기둥과 더불어 한강 다리 상판이 강물로 쏟아져 내린때문이다. 한강 물은 500명 이상의 인명을 삼켜버리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날 종로서 경찰 77명도 한강 다리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한강철교는 더 이상 피난민의 행렬을 이어주지 못한 채 살을 잃어버린 공룡처럼 앙상하게 허공으로 뼈를 들어냈다. 북한군이 미아리 저지선을 밀고 서울로 들어선 지 2시간 만에 한강 다리는 국군의 공병대에 의헤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근호씨가 28일 아침 7시경 경찰 임시주둔지인 수원초등학교을 찾았을 때, 경무과장님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야산을 헤맨 끝에 암매장한 장소를 확인하고 소나무를 잘라 연필로 모표를 써서 세우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울음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실신한 사모님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에도 피멍을 고이게 하였다.

슬퍼해야 할 넉넉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런 피난 대책을 세워주지 못하는 경찰서를 나서는데 인공기가 공습을 시작하였다. 근호씨는 큰 차량의 바퀴 밑으로 미끄럼을 타듯 숨어들었다. 동행하던 경찰은 비행기에서 쏟아내는 총알을 피해내지 못하였다. 그는 한쪽의 어깨를 거의 잃어버린 채, 의무대로 옮겨 갔으나 큰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9시경 되어서야 영등포에서 수원역으로 기차가 도착하였다.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전쟁 상황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였고 남으로 밀고 온다는 정도이지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얼굴에 담고 있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기차 지붕 위에 짐짝처럼 매달리기 시작하였다. 근호씨도 사모님을 도와 기차 지붕 위로 올라가 다른 사람들처럼 짐짝이 되었다. 이때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차에 문제가 생겨 영등포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차 칸을 비우고 몰려나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한강 다리는 폭파되었고 영등포에 인민군이 진입한 상태인데 기차가 돌아간다니 말이 되는가.

근호씨는 기차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사모님은 먹을 것을 사오겠다며 하차하였다. 조금 있자니 기차가 부산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다시 승차하느라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우성치는 인파 속으로 사모님은 묻혀버렸다. 그 후 그분을 영영 만나지 못하였다. 기차는 남으로 내달렸다.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지붕 위에서 비명이 들려 왔다. 머리를 부딪치는 사람들이 죽음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열차 칸에 앉아서 떨어지는 죽음을 보는 것은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무려 6시간을 마음 졸이며 6월 29일 새벽 4시 조치원에 기차가 섰다. 기차 대합실은 초만원이었다. 너무 피곤하여 의자 밑으로 스스럼없이 들어가 눈을 감았다. 눈을 떠보니 훤한 역광장에는 피난민이 들끓고 있었다. 광목 치마를 입은 떡 장사가 눈이 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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