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옥 시인/논산문화원장

(동양일보) 산골의 맑은 저수지 옆으로 난 좁은 도로는 낮에 걷는다면 상당한 낭만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 가끔씩 번개가 치고 있었다. 번갯불빛에 도로에 고인 빗물이 은회색으로 빛났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던 청년은 분명 5리쯤 된다고 했는데 가도 가도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술 취한 사람이 밤길을 걷다가 저수지로 떨어져서 죽은 적도 있어요. 그러니 저수지 쪽으로 가지 말고 숲 쪽으로 바짝 붙어 걸어요.”라던 그의 친절한 안내가 오히려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저수지 쪽은 추락할 수 있다는데, 낯선 숲에서도 짐승이 뛰쳐나올 것 같았다.

그쳤던 비가 다시 퍼붓기 시작했다. 선이는 우산을 든 나의 팔뚝을 꼭 잡았다. 덜덜덜 떠는 선이의 공포가 그대로 나에게 전달됐다. 침묵은 선이의 공포심을 더하는 것 같아 나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 했다. “전에 시화전할 때 재미있었지?” 나의 말소리도 떨렸다.

그때 저 멀리서 불빛 하나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후미진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 또한 불안한 일이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우리와 마주쳤다. 나는 플래시를 멈춰 세웠다. 노인이어서 다행이었다. 건장한 청년이었다면 우리의 공포가 더 커졌을 것이다. “개암사가 아직 멀었나요?” “전에 개암사를 가 본 적 있나?” “아니요. 초행길인데요.”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망설였다. “초행이면 찾아가기 어려운데…. 나를 따라오게.”

노인이 앞장을 섰다. 그제서야 선이가 말했다. “선배님. 저 신발이 벗겨져 맨발이어요.” 나는 신었던 운동화를 벗어 선이에게 신기고, 맨발로 돌길을 걸었다.

노인은 아랫마을에 볼일이 있어 가던 참이라 했다. 소나기를 뚫고 한참을 온 노인은 우리만 보내기가 미덥지 못해 가던 길을 되돌아섰다.

노인에게 몇 번인가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고마울 것 없어. 우리 애들이 도회지에 나가 사는데, 그 애들도 누군가에게 길을 묻겠지. 내가 길을 알려 주어야 그 애들에게도 누군가가 길을 알려 줄 것 아닌가.”

마침내 절 마당에 도착했다. 노인은 주지스님과 농(弄)을 섞은 인사를 반갑게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는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던 일행과 극적으로 해후했다. 나는 노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담배 몇 갑을 내밀었다. 노인은 선뜻 받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이렇게 담배 몇 갑을 받으려고 가던 길을 돌아섰던 것이 아니야. 너희들은 이렇게 금방금방 빚을 갚고 사니? 세상은 때로 빚을 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빚을 놓기도 하면서 사는 거야.’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노인은 이제 이승에 계시지 않을 것이나 그 눈빛은 내 가슴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게 몇 해 전이었던가. 사십 년이 다 되는 까마득한 옛날이다. 그때 나는 그 노인에게서 빚을 내어 길을 찾았다. 살면서 두고두고 빚을 갚겠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빚은 더 늘어난 것 같다. 또 누구에게서 받은 귀한 마음과 정성을 하찮은 물질로 다 갚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이제라도 서둘러 빚을 갚고, 나도 노인처럼 우리 아이들을 위해 빚을 놓아야 할 텐데, 걱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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