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일보와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매월 첫째·셋째 주 목요일 오후 3시 동양일보 지하 아카데미홀에서 ‘동양포럼 목요 공개강좌’를 열고 있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용환 충북대교수가 각각 ‘장수개벽을 철학한다’, ‘장수사회의 윤리’, ‘장수의 교육’을 주제로 강좌를 담당한다. 이 글은 유 위원장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나이 들어도 배우기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1. 평생교육과 학습사회

여러분은 ‘이 나이에 무슨/ 늙은이가 뭘?’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또 듣습니다. 더구나 나이 들어서 배운다는 것에는 거부반응으로 코웃음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그런 것인지, 여러분의 휴대전화를 가지고 함께 생각하여 보기로 합시다.

우선 가정에 고정돼 있던 전화기보다도 지금 여러분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아주 작은 휴대전화로써 통화를 하고, 전화기를 훨씬 뛰어넘는 편하고 유익한 생활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현재의 생활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수단이 됐습니다. 이른바 여러분의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정착돼 버렸습니다.

그 휴대전화를 언제 어떻게 쓰게 되었습니까? 아드님이 사주었고, 누구에게 선물 받고, 광고나 친구의 소개로 구입했습니다. 그것도 배우기입니다. 휴대전화를 손에 넣은 것부터가 배움이라면 그 용법은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아드님이나 손자에게서, 판매점에서, 혹은 친구에게서 그리고 사용설명서(메뉴얼)에서 듣고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 역시 배우기입니다. 그리고 가끔 용법에 막히면, 배우자나 자손이나 친구에게 묻습니다. 그것 또한 배우기입니다. 이제는 그 휴대전화로 모든 통신을 합니다. 그것은 휴대전화에 대하여 배운 보람입니다.

그런데 그 용도와 사용법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저 같은 둔한 사람은 겨우 전화를 받고 거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데, 어떤 이는 그것 가지고 못하는 게 없습니다. 집에 앉아서 또는 차안에서 장보고 주문하고 은행거래하고, 극장관람이나 외국 여행 예약하고, 국내외의 야구나 축구나 농구나 골프 경기의 실황을 보며, 영화나 음악회도 즐깁니다. 사진을 찍고 보내며, 모르는 것과 연구 자료를 검색하고, 글도 씁니다. 이것은 교육에서 말하는 개인차가 아주 다양하다는 것을 보이는 바로 그것이며, 배우기에 따라서는 나이 들어도 IT나 AI의 최첨단 기기와 같은 새로운 문명에 잘 적응하면서 산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육은 다름 아닌 삶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고, 배움이라는 것은 이내 삶의 전 과정이고 삶 그 자체라서, 배우기는 나이와 때가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어리고 젊어서 배워야 한다고 때를 놓치지 말라고 성화였지만, 이제는 나이 들수록 더 배워야 한다는 수요와 필요로, 배우기가 나이 든 세대에게 더 긴박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a. 정보량의 폭발적 증가와 지식의 생명 단축

우리는 급변하는 현대사회가 지어내는 새로운 문명 속에서, 대량의 정보화 지식을 접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 정보는 아주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내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에 상관없이 다가와 주어지며, 그 유전(流轉)과 변화가 심할수록 지식의 생명은 점점 짧아집니다. 지식의 생명이 짧아지니 이미 배운 것은 쓸모가 없게 되고, 새로 배우지 않으면 낙후하고 소외된다는 결과가 됩니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배우기=학습의 과제입니다.

b.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르는 배우기

그러니까 그 새로운 정보와 지식사회에 적응해 살기 위해서는 계속하여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교육은 다름 아닌 삶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고, 배움이라는 것은 이내 삶 그 자체, 곧 전 인생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평생교육과 계속교육 곧 학교전교육과 학교외교육과 학교후교육이 필요하다는 이유이고 상황입니다. 이제 배움이라는 것은 나이가 없으며, 특히 장수사회가 되어 노숙년기가 길어질수록 그 수요와 필요가 더욱 절실하고 긴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백세시대를 노래하고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60년대는 40년간을, 70년대는 30년간을, 80년대는 20년간을, 90년대는 10년간을 더 살면서, 그 급변하는 시대가 창출하는 엄청난 정보지식에 부딪쳐야 한다는 것을 헤아려야 하고, 배움으로 해결하고 극복해나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유네스코가 온 세상을 향하여 평생교육(lifelong education, 1965)이라는 이념을 제창하고, 이어서 7년 뒤에 학습사회(learning society, 1972)라는 방법을 선포한 것이 그러한 까닭이었습니다.

여기까지의 말씀으로, 저의 ‘나이 들어도 배우기’의 강연은 다한 것과 같습니다. 나이 들어도 계속하여 배워야 한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것, 곧 산다는 것의 필수불가결의 표징입니다. 삶은 이내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배움의 과정이기 때문에, 배움은 때가 없고 나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나이 들어서이기에 더욱 배움이 긴요하게 된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나누어 드린 자료는 나이 들어도 배우기를 더 생각하여 보시라고, 또는 어디에 나가셔서 대화하실 때에 화두로 삼으시라고 챙겨드린 것입니다. 그 몇 가지를 함께 짚어보겠습니다.



2. 21세기의 학습

a. 21세기의 문맹자

미래학자들은 평생교육과 학습사회인 21세기에서 ‘학습하지 않는 사람, 고쳐 학습하지 않는 사람, 재학습하지 않는 사람을 문맹자라고 합니다. 20세기는 읽고 쓰기를 못하는 것이 문맹이었지만, 21세기에는 읽고 쓰기는 이미 극복한 단계라서, ‘학습하지 않거나, 고쳐 학습하지 않거나, 다시 학습하지 않는 사람’이 문맹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b. 교육의 네 기둥

유네스코는 21세기 교육의 지향을 세우고 대비하기 위하여, 다년간 세계 각국의 학자들의 연구와 자문을 종합하여 내놓은 보고서를 ‘인류의 보배(The Treasure)’라 는 이름으로 1996년에 반포하였는데, 그 대원칙으로 내세운 ‘교육의 네 기둥(The Four Pillars of Education)’은 우리의 주목을 끌게 합니다.

Learning to Know(알기 위한 학습).

Learning to Do(행동하기 위한 학습).

Learning to Live Together, Learning to Live with Others

(더불어 살기 위한 학습).

Learning to Be(존재하기 위한 학습)

이 교육의 네 기둥은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인간 한살이의 학습을 시간적 종적(縱的)으로 볼 때, 지식을 위한 학습, 실천하기 위한 학습, 더불어 살기 위한 학습, 존재하기 위한 학습의 순차적인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간적 횡적(橫的)으로 보면, 네 기둥의 네 가지 영역의 학습이 기능적으로 편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 네 기둥에서 밑줄을 친 ‘더불어 살기 위한 학습’은 가장 중요한 영역이나 단계라는 것인데, 도덕적 윤리적인 요소라 할 ‘이웃과 더불어 살기’를 학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의 ‘존재하기 위한 학습’은 해석이 까다롭지만, 노숙년 세대들이 하여야 할 자기실현의 욕구 같은 당위적 삶, 꼭 하여야 할 배움의 영역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육의 네 기둥은 철저하게 평생교육과 학습사회의 이념에 터한 것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c. 학습방법의 이념

이러한 21세기 교육의 지향은 당연히 만인을 위한 평등교육(education for all)을 위하여, 언제(anytime) 어디서나(anywhere) 누구나(anyone) 학습한다는 방법을 내포합니다. 사람도 시간도 장소도 가리지 않는 학습자 중심의 교육과 학습방법입니다.

IT산업의 발달로 여러분이 벌써부터 느끼고 알고 있는 사이버 교육에서는 3무 대학(three-less—campus/ professor/ book—college)이라는 형태를 눈앞에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캠퍼스가 없는 대학(장소가 따로 없고 교실이 없는 대학), 교수가 없는 대학(사이버 공간에서는 교수가 나와서 강의하지 않음), 교재가 없는 대학(유선 무선의 라인에서 특정한 교재가 없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3. 고전(古典)이 보이는 배우기

이렇게 미래를 위하여 학습사회를 지향하여 나갈때에, 우리는 고전에서 보는 학습방법도 생각하여 보아야 합니다.

a.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논어의 첫 대목은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그리고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와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와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愠)이 기쁘고 즐겁고 또한 군자답지 않느냐? 하는 공자의 말씀으로 논어는 시작합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고, 먼 친구가 와서 함께 배움을 나누니 즐겁고, 나의 성취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 쓰지 않음이 군자답다는 자부심도, 군자는 본래 자기 자신을 위하여 배우는 것이라 세평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배움의 길을 통달한 모습입니다.

논어는 권말에 ‘천명을 모르면 군자일 수 없고, 예를 모르면 문명사회의 방향을 모르고, 말을 모르면 개인과 세상을 인식할 수 없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로 하여 맺고 있습니다. 배움의 시작과 성취의 지향이 앞뒤에 이렇게 부합하도록 꾸민 것입니다.



b.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그리고 우리가 배워서 자신을 새롭게 한다는 지향에서, 대학의 전(傳) 2장(章)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좌우명은 참으로 보배로운 성인의 본이라 할 것입니다.

은(殷)나라를 세운 성탕(成湯)임금은 세숫대야에 ‘진실로 새롭고자 하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습니다. 대야에까지 좌우명을 새기고 수신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은 아우를 제후(諸侯)로 임명하여 은나라의 고토(故土)에 보내면서 훈계합니다. 타락하여 패망한 은나라의 ‘인민을 새롭게 진작하여라.(康誥曰 作新民)’

시전(詩傳)에서는 주나라가 된 것이 ‘조상 후직(后稷) 이래 천년의 긴 세월에 걸쳐 덕을 쌓은 공으로 천명이 내려 나라를 새로 열었다.’는 말로 건국이념을 찬양합니다.(詩曰 周雖舊邦 其命惟新),

그래서 성탕임금의 좌우명이나, 무왕의 강고나, 주나라의 역대 성현들은 그 최고의 지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是故 君子無所不用其極)고 합니다.



4. 평생 배운 성현(聖賢)들

a. 구도적 탐구

우리가 아는 성현들은 하나같이 평생을 열심히 배운 분들입니다. 호학(好學)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자는 ‘아침에 바른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절절함으로 도를 구했습니다.

b. 인류의 스승

우리가 인류의 스승이라고 하는 석가(釋迦, 565-485 BC)도, 공자(孔子, 552-479 BC)도, 소크라테스(Socrates, 470-399 BC)도, 평생 호학하는 가운데에서 깨닫고, 그 보람으로 가르쳤습니다.

c.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 충서(忠恕)

공자가 증참(曾子)에게 한 말씀은 참으로 뜻 깊은 술회입니다. ‘참아, 나는 일이관지하였느니라.’ 하시니, 증참이 ‘예, 그러셨지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공자가 잠간 자리를 비우자, 영문을 모르는 동석했던 제자들이 증자에게 몰려와서 ‘스승님의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묻습니다. ‘스승님은 평생을 충서(忠恕)로 일관하셨다는 말씀을 한신 것이다.’라고 증자가 설명합니다. 공자는 평생을 올곧게(忠) 그리고 남을 헤아려(恕) 사셨다는 것, 그 호학을 한결같이 하고 이웃을 나의 마음같이 헤아리며 사셨다는 것입니다.



5. 배우는 마음, 열린 마음

a. 배움의 지향

우리 선인들은 배움의 지향을 성인이 되는 것에 두었습니다.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서두, 입지장(立志章)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뜻을 세우되, 반드시 성인이 되겠다고 스스로 기약하여(初學 先須立志 必以聖人自期)……’라고.

b. 성인도 사람일 뿐

여기서 배움의 목표를 성인으로 삼는다는 점을 요새는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현대말로 하면 성취수준을 성인군자와 같은 이상적 인간, 모범적 인간이라는 높은 수준에 두고 그런 포부로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맹자도 같은 말로 후학들에게 가르치면서, 중국 최고의 성인이라 하는 ‘요(堯)임금과 순(舜)임금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 것뿐(堯舜與同人耳)’이라 하고, ‘순(舜)임금도 사람이고, 나 또한 사람이다.(舜人也 我亦人也)’라고 하면서, 학업의 높은 수준과 정진을 독려합니다.

c. 말과 개미에게 배움

그러나 배움은 반드시 성현들로부터 아래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배움의 동기와 과정과 요령에는 상하좌우,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서 배운다는 열린 마음이어야 이루어집니다.

한비자(韓非子)에 재미있는 경구(警句)가 있습니다. 관중(管仲) 같은 정치와 병법의 달인(達人)도 궁했을 경우에, 은자의 깨우침으로 위기를 벗어났다고 하는 것인데, 전쟁터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에, 은자가 일러준 ‘늙은 말을 앞세우고 따라가면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활로(活路)를 일러준 것이나,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마름의 고난을 겪을 때, ‘개미굴을 파면 그 아래에 반드시 물이 나온다.’는 것 등은 성현의 교조(敎條)에서는 배울 수 없는 슬기(以管仲之聖而隰鵬之智 至其所不知 不難師於老馬與蟻 今人不知以其愚心而師聖人之智 不亦過乎)로서, 지금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니 그것 또한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배움에는 어리석은 마음(愚心)이 성인(聖人)을 가르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개탄하는 것입니다.

이 글을 맺으면서, 나이 들어도 배워야 하는 의미와 어른스러움의 경지를 되새기고 가늠하고 다짐합니다.

배움은 기쁨이고 즐거움이며, 자기 성찰과 성장의 길입니다. 자신의 삶을 충실하고 풍요하게 하며, 사회 성원의 하나로 우뚝 서게 합니다. 높은 수준의 자기실현을 이루고, 선배로서의 권위를 내외에 유지하고 봉사하며, 자손에게 전하는 가장 값진 유산 상속의 자산을 쌓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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