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ESI교장

한희송/ ESI 교장

(동양일보) 학문에서 이론이란 현실적용이란 검증과정을 통해 그 효용성이 인정된 가설에게 주는 지위이다. 가설을 성립시키는 조건들에게 비현실적 순수성을 확보해 주고 관련된 용어들에게는 비현실적 추상성을 부여하면 그 가설은 현실성을 검증 받을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된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론은 비현실적 조건들을 수립함으로써 그 현실적 적용가능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현실적용가능성을 이미 확보한 이론을 실제적으로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해석’이란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1+2=3은 현실적용가능성을 확보한 참으로 간단한 문제이지만 이것을 실제로 현실에 적용할 경우 해석의 문제가 대두된다. 고등어를 한 마리 먹고, 추가로 소를 두 마리 먹은 경우 이에 1+2라는 수식을 적용시킬 수 있는가는 수학적 해석의 문제이다. 해석수학은 기본적으로 집합론과 미적분학을 탄생시켰다. 2x3=6은 매우 쉬운 문제이지만 무엇과 무엇을 곱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곱셈의 현실 적용문제가 되어 버린다. 2x3의 값이 ‘사과 여섯 개’가 되려면 적어도 2가 사과를 의미하는 동안 3은 사과봉지나 사과상자를 의미해야 한다. 즉 집합이란 개념이 없으면 2x3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해석방법이 없다.

또한 2나 3이란 수가 현실적으로 존재해야 2와 3이란 수가 해석하는 현상적 원소가 존재할 수 있다. 유클리드의 생각처럼 ‘점’은 위치는 있으되 크기를 가질 수 없고, 아무리 작은 수라도 그보다 더 작은 수가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다면 하나의 수가 해석하는 어떤 집합의 원소는 당연히 그 크기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수인 무한소(無限小)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것에 크기를 부여해야 현실적용이란 해석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미적분은 이 무한소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무한소의 개념과 이를 바탕으로 한 미적분의 탄생, 그리고 집합개념의 등장은 수학의 해석, 즉 수학의 현실적용이란 난제를 해결했다. 그와 관련된 사건 중 하나가 해왕성의 발견이다. 다른 행성들은 너무나 당연히도 관측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해왕성은 계산에 의해 위치가 들통 나는 수모를 겪었다. 해석수학을 통해 해왕성의 존재와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 천왕성의 궤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은 매우 유용한 자료였다. 뉴턴(Newton)이 옳다면 중력을 이용해 천왕성의 움직임을 흔드는 어떤 물체가 있어야 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교육개혁은 현실가능성을 가진 문제이다. 그러나 그 해결책들이 실제로 긍정적 결과를 동반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교육개혁이 의미하는 ‘교육’의 최소한의 의미에 대해 인식의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즉 교육의 ‘해석학’적 접근에서 단순화된 최소한의 인식이란 것이 교육의 현실적용을 보전해주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이나 ‘공부’가 세상에서 ‘나’만의 물리적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 해석되고 나면 그로부터 유래한 오류들이 교육개혁의 현실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1846년 오늘은 르베리에(Le Verrier)가 새로운 행성의 존재를 증명하여 ‘펜 끝으로 행성을 발견한 남자’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날이다. 논리적 사유가 현실을 올바로 분석하여 그 방정식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일은 해석의 요소들이 오류를 품지 않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지구와 태양과의 평균거리보다 30배나 더 멀리 떨어진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을 계산만으로 찾아 낸 것이 무려 173년 전의 일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수단이 아니라 부귀영화의 수단으로 학문의 존재가치를 격하시켰던 조선말의 정신은 교육개혁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개혁의 근본 개념이 최소한의 크기마저 가질 수 없는 그래서 해석할 수 없는 비루한 추상에 머문다. 교육의 본질에 실체적 존재가치를 두는 일만이 우리의 교육개혁에 현실해석능력을 줄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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