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재일조선인 운동의 역사

정치적 압박 및 노동과 생활면에서 가해지는 온갖 차별 아래서도 재일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이는 보통 재일조선인 운동으로 불리는데, 여기에서 바로 노예이기를 거부한 재일조선인의 조선 민족으로서의 긍지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뚜렷이 드러난다.

최초로 이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룬 박경식에 의하면 재일조선인 운동은 “인텔리, 학생이 운동의 선두에 섰다”라는 특징, “비조직적이고 파벌적인 대립을 초래해 대중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결함, “대탄압과 그 조직의 철저한 파괴, 지도 간부의 대량 투옥”이라는 장애 등을 안고 있으면서도 “일본 노동자 계급의 강력한 동맹군으로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그 역할은 조선 민족 해방투쟁사의 일환으로서 올바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운동의 최초의 담당자는 유학생이었다. 국권침탈 직전, 유학생은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를 만들어 합병에 반대하는 시위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지만 모임이 해산돼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합병 후, 이 모임의 흐름을 계속 이어온 유학생들은 ‘조선 유학생학우회’를 결성하고(도쿄 1912년, 교토 1914년), ‘반일=민족주의’ 사상을 확산시켜 나갔다.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가와카마 하지메(河上肇), 오스기 사카에(大杉榮)등의 영향을 받아 출세를 꿈꾸며 일본에 건너온 조선 청년들이 귀국할 때에는 폭탄을 안고 돌아가는 판국이라고 할 정도였다. 제1차 대전 후의 민족자결 사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행동에 나선 것도 이들 유학생이 모여 ‘조선독립대회’를 열고 일본과 전 세계를 향해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3․1 독립운동의 선구적 임무를 수행한 것이었다. 1921년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고 있던 와중에도 유학생 약 300명이 모여 동맹휴교를 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 학생문제를 치안 문제로 다룬 것도 이유가 없지 않았다.

1910년대의 조선인 유학생의 애국 투쟁은 일본 정부의 탄압과 체포로 즉시 수그러들었다 고는 하지만, 이는 재일조선인 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재일조선인은 각계각층에 걸쳐 이 애국 투쟁을 펼쳐 나가게 된다.

1920년대 전반, 재일조선인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고, ‘재일본노선노동총동맹’이 결성(1925)돼 조선인 운동의 담당자가 유학생에서 노동자로 옮겨가게 됐다.

이와 함께 공산주의 사상이 지도 사상으로 자리 잡게 됐다. 1925년에는 요시찰 재일조선인의 66%가 민족주의자, 26%가 공산주의자였으나, 1930년에는 각각 16%와 71%로 그 비율이 역전됐다. 계급적 자각이 심화함에 따라 재일조선인 노동자의 노동쟁의도 불어났다(1925년 46건 1075명에서 1929년 256건 7661명).

이러한 조선 노동을 중심으로 여러 사상단체가 만들어져 통일이 이뤄지고(조선인 단체 협의회, 1927), 청년조직이 결성됐으며(재일본조선 청년동맹, 1928), 여기에 기존의 조선 유학생학우회가 가담해 매년 3․1 기념일 투쟁, 메이데이 투쟁, 국치기념일 투쟁, 진재 학생 기념일 투쟁, 이왕 국장일(李王國葬日)인 6․10 투쟁 등 민족 독립투쟁이 전개됐다.

그런데 1930년에 들어서면서 재일조선인 운동은 그 형태가 변화된다. 코민테른의 일 국 일당 주의 방침에 기초해 조선인으로서의 독자적인 단체, 독자적 활동방식이 부정되고, 일본인 조직의 일환으로 편입된 것이다.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은 해산되고 대신 일본 공산당 내에 민족부가 설치돼 이것이 재일조선인 운동을 지도했다(1931). 그 결과 주요 과제로서의 민족 독립투쟁의 의의는 약화하고 일본 혁명투쟁이 이를 대체하는 비율이 늘어나게 됐다.

우선 조선노총은 해산하고 ‘전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전협)’에 가입했다(1930). 이때 2만3500명이나 되던 조선노총원 중 전협에 재조직된 것은 겨우 2660명밖에 되지 않았다. 전협 중앙부는 공산당 민족부 방침에 따라 조선, 대만, 중국의 노동 강화에 대한 범민족적 차별 반대 및 이들 식민지, 반식민지의 노동조합지지 제휴를 위한 투쟁과 ’소비에트 동맹 옹호, 조선․대만의 완전 독립을 위한 투쟁을 신 행동강령으로 내걸고, 이 방침에 따라 한일 노동자의 공동투쟁을 지도했다. 32년부터 33년에 걸쳐 전협 조합원의 과반수를 재일조선인이 점하게 되고, 전협은 재일조선인 운동의 중심 무대가 됐다. 또한, 1929년에 결성된 일본반제동맹에는 조선인이 적극적으로 가맹해 30년대에 들면 성원 대다수를 조선인이 점해 그 지도권을 장악했다. 일본적색구원회, 일본소비조합연맹에도 참가했다. 특히 “일본의 재일본조선노동자의 문화적 투쟁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에 각각 포괄돼야 한다”라고 해서 재일조선인 문화운동가는 코프에 가입했다(1932).

1930년대부터는 일본 해방운동의 일부로서, 그 범위 내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추진하는 것이 재일조선인 운동의 기본형태가 됐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도 1935년 일본 공산당 중앙이 궤멸함으로써 침체에 빠져들었다. 그 후 인민전선 방식이 제출된 35~39년 시기에는 전국에 걸친 통일적 활동보다는 지역마다 조선인 단체가 결성돼 조선인을 자각시키는 활동이 재개됐으나 그마저 39년 전후의 공산주의자 탄압으로 힘을 잃게 된다. 이처럼 재일조선인 운동은 어쨌거나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며 40년간 끊임없이 추진됐다. 그러므로 재일조선인 운동은 ‘민족운동’이건 ‘극좌 운동’이건 간에 일본 정부에게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국가사회의 치안 유지상 경찰의 중요한 대상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라고 간주해 해마다 다수가 연행돼 어떤 자는 옥사하고, 어떤 자는 상처를 입었다.



2. 동화정책의 전개 : 협화사업의 시대

●‘협화사업’의 발족

1939년은 재일조선인 역사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한 해였다. 이때부터 두 가지 중요한 사업이 개시돼 패전 때까지 계속됐기 때문이다. 하나는 ‘국민징용령’의 제정을 기회로 조선인 강제연행 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또 하나는 ‘중앙협화’가 설립돼 강권적인 동화정책이 전개된 것이다. 재일조선인 문제는 말하자면, ‘대동아공영권’ 체제 만들기의 일환으로서 국가권력의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관여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침략전쟁의 파고 속에서 쟁ㄹ조선인도 위로부터 조직돼 간 것이다. 바로 이 때 노동력의 징용과 함께 동화정책이 본격화 돼 간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일본의 국가권력이 가장 조직적․강권적으로 재일조선인의 일본화를 추진한 것은 1939년 이전까지는 사회적 동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 살아가기 위해 일본어나 일본의 생활습관을 익힐 수밖에 없었고, 동화작용은 사회적인 강요에 의해 추진됐으므로 국가권력이 직접 간섭하는 일이 적었다. 일본 정부는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국가의 의지로 동화정책을 취했지만, 재일조선인에게는 일본 사회의 동화 강제력에 위임했던 것이다.

확실히 그 때까지는 조선인의 일본 도항을 간섭하거나 혹은 치안대책의 대상으로서 구속하는 방침은 취했어도, 일본 정부가 직접적․전면적으로 재일조선인을 동화시켜 통제하는 그런 대책은 취하지 않았다. 간토 대지진 이전에는 제일조선인의 숫자가 적었던 탓도 있고 해서 정부도 민간도 각별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일종의 방임기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간토 대지진으로 재일조선인 문제는 일야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이를 계기로 ‘내선융화(內鮮融化)’설이 나오고 ‘융화단체’라는 것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오사카에서만도 이백 수십 개의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들은 실상 ‘내선융화’를 이용물로 삼는 경우가 많았고 오히려 ‘비융화’의 원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나마 비교적 융화라는 이름에 걸맞은 사업을 펼친 것은 오사카․효고․가나가와 등 부현청(府縣廳)이 관여한 단체 정도였다. 일본정부는 이들 민간 ‘융화단체’에 재일조선인 대책을 위임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상태가 거의 1935년 전후까지 계속됐다. 따라서 ‘내선일체’를 목적으로 한 위로부터의 조직화는 그 실행의 측면에서 보아 재일조선인 쪽이 가장 뒤떨어져 있었다. “조선은 그럭저럭 잘 돼 가고 만주에서도 수행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아 있는 곳은 이인가? 그것은 일본 본토이다.… 가장 중요한 일본 본토에서 이 인식(내선일체/인용자 주)이 없는데 어떻게 외지(外地)가 충분히 성지(聖旨)로 받들 수 있단 말인가?”

본 정부로 해금 재일조선인 대책을 촉구한 직접적인 계기는 조선인 노동자의 실업문제였다. 소화(昭和) 공항기에 일본에 건너오는 조선인의 수가 급증한 결과, 일본인 실업자 문제가 거의 해결된 후에도 수많은 조선인 실업자가 남게 됐다. <협화사업연감>의 설명에 따르면 “실업의 결과, 생활 곤란 등으로 범죄나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분쟁이 속출해 조선인 문제가 다시 사회의 주목을 끌게 됐다”는 것이다. 반면에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도 조선인으로서의 생활·문화운동, 노동운동이 지속 확대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1933년부터 내무성 사회국을 중심으로 그 조사와 대책 마련에 나섰는데, 그즈음 재일조선인의 경제문제를 ‘내지동화를 기조로 해 지도교화’하는 문제로 바꾸게 된다. 정부의 눈에는 재일조선인의 생활보다도 그 민족의식의 지속이 위험스러운 문제로 비친 것이다. 중국 침략전쟁의 심화는 ‘후방 통일’이라는 입장에서 이러한 태도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이처럼 1935년 전후부터 재일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문제시해 그 통제와 동화를 정부의 과제로 삼게 됐다. 재일조선인 대책의 중심적인 실무를 당당했던 다케다 유키오(武田行雄)는 그간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문제의 중요성은 그들 중 다수가 언어, 풍속, 습관, 문화의 정도 등에서 일본과는 현저히 달랐다는 점에 있었다.… 한 나라의 번영의 기초는 민초(民草)의 완전한 일치단결에 있다. … 지금과 같이 칠십 수만 명에 달하는 다수의 동포가 일본에 살면서도 일본 생활과 유리돼 존재하는 것은 건전한 사회 상태라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 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일본인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현재 가장 긴급한 일이다.”



이와 같은 정치적 관점에서 정부는 1934년 각 성(省) 간에 협의를 거쳐 1936년 ‘협화사업’비로 5만 엔의 예산을 책정하고, 같은 해 8월 ‘협화사업 실시 요지의 통첩지시’를 발했다. 그리고 협화사업의 기본 이념을 “동화를 기조로 하는 사회시설의 철저한 강화를 도모하고, 이로써 국민생활의 협조해화(協助諧和)에 이바지하고 공존공영의 열매[實]를 거둔다”고 정했다. 여기에서 재일조선인 대책의 방향이 세워지게 됐다. 또한 ‘국민(생활)의 협조해화’라는 표현에서 전전(戰前) 재일조선인의 일본인화를 의미하는 특별한 용어인 ‘협화’라는 글자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침에 기초해 1937년부터 39년에 걸쳐 ‘협화사업’을 실시하기 위한 체제 만들기가 추진되고, 정부의 지휘 하에 처음에는 각 부현 단위의 ‘협화회’가 그 후에는 그것을 정리 지도하는 중앙기관으로서의 ‘중앙협화회’(1939.6.)가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재일조선인을 동화시키려는 국가의 의지가 공공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협화사업’의 실시를 위해서는 우선 재일조선인을 조직적으로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다. 이는 ‘협화회’의 창설로 달성됐다. 협화회는 무엇보다도 재일조선인의 통제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재일조선인은 모두 의무적으로 협화회에 가입해 ‘협화회 수첩’(회원장)을 교부받고, 반-분회(지역과 직장)지회-부현협화회–중앙협화회라는 질서정연한 피라미드형 조직에 의해 장악됐다. 게다가 그 조직은 말단으로 내려감에 따라 경찰조직이 실권을 장악하는 구조로 돼 있었다. 즉 중앙에서는 후생성사회국이 주무관청이고, 내무성 경보국이 각별히 협력하는 관계 하에 재단법인 ‘중앙협회회’가 존재했으나, 부현협화회에서는 회장= 지사 밑에 부과장(部課長)이 임원이 되고, 지회에서는 지회 그 자체가 경찰서 단위로 설치돼(1940년 당시 10040지회) 경찰서장이 지회장을 겸임하고 특고주임과 내선계(內鮮係)가 간사를 통솔했으며, 그 아래 분회에는 ‘경찰분서 주임 및 기타의 적당한 경찰관’이 분회장에 임명되는 구성 방식이었다. 일본의 국가권력은 이렇게 해 재일조선인 전체를 비로소 직접적으로 장악, 지배할 수 있었다. 이 조직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위로부터 강권적인 동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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