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논설위원 / 청주대 명예교수

박종호 논설위원 / 청주대 명예교수

(동양일보) 좋은 이웃과의 관계를 선린관계(善隣關係)라 하고 반대의 경우는 악린관계(惡隣關係)라 할 수 있다. 세계는 두 관계적 현상이 혼재하고 있다. 이웃은 4촌보다 낫다는 한국의 속담처럼 인접하고 있는 국가 간에는 좋은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하여 유독 일본과 한국 간에는 악린관계가 계속되고 있다. 지역협력체제 강화라는 지구촌사회의 추세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과 일본과의 악연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하여 일본이 경제 보복 내지 경제침략을 한 것이라지만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한국(조선) 침략의 구원(舊怨)이 병이 되고 이 병이 만성질환 내지 불치병으로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 간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았고 언어도 몰수하였으며 성과 이름까지 바꾸게 하면서 한국(조선)을 식민통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한민족과 역사 앞에 진정으로 사과하지도 않았다. 그토록 듣고 싶어 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죄의 말 한마디’를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다. 히틀러의 범죄행위에 피해를 입은 국가와 국민들 앞에 수없이 사과하는 독일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거기다가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이 역사적 사실로 명명백백히 증명되었는데도 초·중등 교과서에 이를 왜곡, 자국의 영토라고 억지주장을 펴고 있다. 한국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온 것이다. 이렇듯 일본은 한국의 위안부에 대한 진솔한 사과를 거부하고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도 부정하며 독도가 한국령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일 관계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풀기보다는 오히려 표류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웃사이인데 선린이 아니라 악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일본은 지난 8월 2일 한국에 대하여 수출무역관리령(시행령)을 개정,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 명단: 수출심사우대국 명단)에서 배제 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한국을 우방국으로 보던 그동안의 입장을 바꾸고 경제보복 내지 경제침략을 강행한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한국에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을 재검토하겠다는 의지와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배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힌 바 있다. 막대한 후유증 발생을 경고한 것이다. 한국이 이를 막으려고 외교력을 집중, 여러 채널을 통하여 선제적으로 노력하였지만 무위(無爲)로 돌아가고 말았다.

세계는 지구촌 한 가족 개념으로 변화된 지가 오래되었고 더구나 인접지역 간에는 블록을 형성하여 경제적, 안보적으로 상호협력 체제를 강화하는 흐름인데 반하여 지정학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전통을 가진 양국관계가 무언가 크게 엇나가고 있다. 역사 갈등이 경제 및 안보갈등으로 전환되는 양상이다. 한·일 간에 ‘마주 달리는 열차’ 내지 ‘치킨게임(마지막 순간까지 버팀)’ 등의 전운이 맴돌고 있는 것이다. 8월 2일 일본 각의에서 아시아 27개국 백색국가명단에서의 한국배제 결정에 대하여 한국의 국정최고책임자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책임이 전적으로 일본 정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경고 한다”는 등의 말로 일본과 대응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런가하면 김영삼 정부시절 국제무대에서 외교활동을 폈던 공로명 전 외무부장관은 “정부 대응이 너무나 아마추어 같다”고 걱정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나라이다. 이웃 4촌이고 다 같이 자본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민주국가이다. 지정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세계 어느 국가들보다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여건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언제까지 적대관계로 지낼 수는 없다. 마음을 열고 선린관계를 구축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한·미·일 동맹 체제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기에 더욱 친한 나라’로, 한·미·일은 더욱 공고한 ‘안보와 평화의 동맹국가’로 발전하여야 한다. 누구보다 일본은 경제대국답게 기존질서를 존중하면서 공존공영의 국제이념 실현에 앞장서야 한다. 역사 앞에 겸허하고 인류에게 공명정대한 자세를 취하여야 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는 금도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국민들은 ‘큰 바다나 큰 음악은 소리가 없다(대하무성 대음희성:大河無聲 大音稀聲)’는 의미의 큰 정치를 보고 싶어 한다. 조용한 가운데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는 대도(大道), 대방(大方)의 정치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앞으로 안보고 살 것 같은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저의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이러하니 한국인의 마음이 어찌 쉽게 열릴 수 있단 말인가. 한일의 악린관계는 전적으로 일본의 야만성에 기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국제도덕이나 규범을 외면하고 침략주의적 근성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일본으로부터 더 이상 사과와 응분의 책임을 요구하고 기대한다는 것은 무의하다고 보고 한국이 ‘동방의 등불’ 국가답게 대승적이며 대아적 차원에서 굳게 잠가놓은 빗장을 풀고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국제사회에 대한 도리이고 양국이 상생할 수 있는 길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원래 한국은 문화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일본보다 한참 앞서 있던 나라이다. 백제의 왕인박사를 비롯한 조상들이 일본에 지식과 문명 등을 이식한 것은 역사적으로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현재에도 일본인들에게 살아있는 실화가 되고 있다. 문화면에서는 한국이 조상 및 선진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이 잘하고 발전하면 한국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극일(克日), 포일(包日), 친일(親日)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전체주의 및 사회주의 국가인 중·러의 대륙세력에 대하여 한·미·일이 함께 위대해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차제에 중국과 러시아 등의 후진형 패거리 행태에 대하여도 국제무대에서 강경하게 경고하여야 한다. 조용히 평화를 누리고 있는 국가에 대하여 무슨 욕심이 있어서 유엔의 결의를 무시하고 침략행위와 같은 야만적 영공침범행동을 자행하였는지 따지고 응분의 책임을 지게 하여야 한다. 최소한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단호히 항의하여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이고, 그것도 민주이념을 같이하고 앞장서서 경제도약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나라이다. 이러한 국가들답게 하루 빨리 좋은 이웃(선린)으로서의 선린관계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얼굴을 마주하는 나라인데도 친밀한 친구의 나라가 되지 못한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서로 불행한 것이다. 지구촌사회에도 면목이 없는 것이다. 관용과 포용으로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수 있어야 한다.

5천여 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민족, 도량과 인격 등을 대들보로 삼아 세운 국가, 문화선진국답게 동북아 평화의 기수가 되는 것이다. 악린관계를 청산하고 선린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과거는 잊지 않되 용서하는 것이다. 과거에 묶여 동면하지 말고 ‘미래’라는 새 지평을 향해 출항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기에 더욱 친한 이웃으로 살 수 있는 나라 사이(선린 간)’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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