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협화사업’의 이데올로기

그렇다면 ‘협화사업’의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 <협화사업연감>(1942)의 첫머리에 정리돼 있는 3개 조를 살펴보자.

첫째, “협화사업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이를 사업의 출발점으로 삼아 지도정신으로 삼고자 하며, 또한 귀착점으로 삼는다”고 한다. “일시동인이란 내지(일본)와 외지의 동포 모두 평등하게 폐하의 적자로서 어떤 차별도 하지 않고” 대우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그 근원을 ‘진무천황(神武天皇)의 팔굉일우(八宏一宇) 정신’에서 구했으며, 직접적인 근거는 대만과 조선을 병합할 당시 내린 조칙에서 구했다. ‘폐하의 적자’로서 구별해서는 안 된다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방침이 설정된 것이다.

둘째, “협화사업은 내지에 살고 있는 외지 동포를 신속하게 내지 생활에 융화해 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그 대상을 정하고 있다. 당시의 ‘외지’란 조선·대만·사할린·관동주·남양군도를 가리켰지만, 1939년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외국인은 조선인이 96만, 대만인이 8000, 기타 소수였기 때문에 ‘협화사업의 대상으로서의 외지 동포란 완전히 조선인’이었다. 그 후 귀화인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조선인의 ‘내지융화’는 가능한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속담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셋째, “협화사업은 국민해화(國民諧和)의 열매를 거둘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는 외지 동포의 내지융화→내지에서의 7000만 동포와 화합 일체화→외지까지 포함한 ‘1억 동포의 일체화’라는 단계적인 발전 전망이 언급되고 있다. 침략전쟁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후방’ 만들기라는 목표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천황제 국가로의 동화 요구는 물론 재일조선인이 낸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전국협화사업대회’(1940.12.)에서 행한 가네미츠 아츠아이(金光厚相)의 훈시에 의하면,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을 기하고, …신속히 국방국가 체제를 정비는 일이 극히 긴요,“함에도 불구하고 증가하는 재일조선인 ”동포는 다소 습속을 달리함으로써 바람직하지 못한 사태를 낳아 국민해화상 자못 유감스러운 상황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본 사업은 날로 그 중요성을 더해 간다“고 지적하고 있다. 밖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내지를 굳건히 하고, 아시아 침략을 확대하기 위해 재일조선인을 보다 깊게 동화시킨다는 발상이다.

이리하여 재일조선인 동화 필요성과 방향을 내세웠지만, 눈앞에 서 있는 조선인은 이미 그 뿌리부터 조선인이었다. 따라서 기치를 내건다고 해서 일본인으로 될 존재는 아니다. 실제로 직접 일을 담당하는 자는 적어도 재일조선인이 일본인과는 다른 민족적 존재임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르기 때문에 동화시킨다는 리얼리즘이 미묘한 표현법이지만, 이것이 전전 동화사업의 감각이었다(전후에는 익숙해진 감각이다). 그러니만큼 여유가 없고 딱딱하다. ‘중앙협화회’는 우선 “내선 동포를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동일한 수준으로 보고 사업을 실시하려 한”데에서 그 때까지의 재일조선인 대책사의 “근본적인 오류가 숨어 있었다”고 반성했다.

‘동등한 상태에 있다는 전제’에 입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다케다 유키오(武田行雄)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해설한다.



“원래 내지(일본)의 제도와 문물은 그 수준과 내용에서 외지와는 모습을 약간 달리하고 있어 무릇 국민교육 과정을 수료한 자를 전제로 짜여 있다. … 따라서 외지 동포에게는 불리‧불편하며, 또 내지 동포에게는 당혹감을 주게 되어 넓은 의미에서 사회 불안의 요인이 숨어 있다.”



여기에서 일본화시켜 끌어올린다는 과제가 새로이 제기됐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가장 다르다고 보았을까? 그것은 동화의 2대 주안점인 ‘황민정신(皇民精神)의 함량’과 ‘일본식 예의범절’의 두 가지였다.

“황민정신의 함양이란, 자신이 일본 신민이라는 굳은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지만, “일반 조선인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각각 다른 정치‧사회 환경 속에서 생활해 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철저한 황민의식을 갖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밝힌다. 그러나 “그 성취는 협화사업의 성취”이므로 “가장 노력을 필요로 한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또한 “내지 생활을 목표로 한 교화”에 대해서도 “어쨌든 그들의 오랜 습관 혹은 버릇을 바로잡아 교화하는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어머니가 자식을 키우는 열정으로 몇 번이건 반복 훈련을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시세의 변동과 함께, 이러한 조선인들이 일본 전국에 걸쳐 거주하게 되면서 조직적‧강권적인 동화작업은 필수적인 일이 됐다. 이에 1939년 10월의 후생성 사회국장과 내무성 경보국장의 연명 통첩은 그 제1항에서 “전국적으로 동일한 방침 아래 동일하게 보조를 맞춰… 관민이 협력하여 계획적으로 실시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이와 같은 방향과 자세를 갖추고, ‘중앙협화회’의 설립을 출발점으로 삼아 위로부터의 동화사업을 전국적으로 추진하였다. 일본에서 운동을 전개할 때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총궐기대회를 열고 서사(誓詞)와 운동가를 제정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국협화사업대회’가 ‘기원 2600년 봉축 기념사업’의 하나로서 후생성·중앙협화회가 주최하고, 내무성·척무성·문부성·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1940년 12월 4일 도쿄에서 개최됐다. 전국에서 1375명의 일본인·조선인 ‘협화사업 활동가’가 참가해 ‘관민 일체’의 협화이념의 증거로서 다음과 같은 서사가 낭독됐다.

1. 일시동인의 성지를 받들어 충량한 일본 신민이 될 것을 기 한다.

1. 신도(臣道)의 실천의 본의(本義)에 입각하여 각각 그 직무에 이바지 할 것을 기 한다.

1. 내지동화(內地同化)의 기조(基調)를 따라 생활을 도야 개선할 것을 기 한다.

이와 동시에 ‘국민협화의 노래’, ‘히노마루(일장기) 형제’가 발표되었다. 당시 얼마나 많이 불렀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고, 또 잊혀진 노래이지만 가사만이라도 채록해 두고자 한다.



‘국민협화의 노래’

세기의 하늘에 빛나는 / 대건설의 동이 튼다 / 아 피로 맺어진 동포 1억 국민의 지금 높이 / 울리는 흥아의 새벽종

협화의 맹서 아름답도다 / 대일본의 기치 아래 / 지금 건국의 신을 함께 우러르면 이 가슴에/ 황민의 피는 춤춘다

내외에 바다가 가로 놓여 있으나 / 생각은 같은 일본인 / 이 새로운 새벽에 국가와 목숨 함께하여 / 울리는 협화의 함성



‘히노마루(일장기)’ 형제

낯선 말에 습과에 / 고향 떠난 나날은 / 마음 쓸쓸한 날도 있으리

설 무릎을 맞대고 즐겁게 / 뜨거운 차 한 잔도 / 함께하는 형제여

같은 태양 빛을 받으며 /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칼 / 흐르는 피는 옛날부터

자, 히노마루 한가운데 서서 서로 사이좋게 용감하게 / 함께 나아가자 전진하자

일시동인은 지극하여라 / 천황폐하 은총 입은 형제가 / 융화하여 비약할 때는

지금 거국적인 총력 근로의 / 땀으로 벼려서 대동아 / 함께 일어나자 흔들림 없이

이러한 선전 활동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 ‘황민의식’ 주입은 표면적인 대응을 제외한다면 재일조선인의 내면으로까지는 파고들지 못했다. 이는 일본이 패전 후 조선인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또 하나의 지주였던 ‘일본식 예의범절’은 사회의 필요성에서 지속·정착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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