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유영선 동양일보 상임이사

(동양일보) 오전 9시56분. 핸드폰이 드르르 떨리며 신호를 보내고, 블루투스로 연결된 손목의 기어가 쉴새없이 지잉~울려댄다. 뭔데 이리 요란하지? 하고 열어보니 행정안전부가 보낸 ‘폭염경보 야외활동자제’를 알리는 안내 문자다. 폭염이 시작되면서 이런 문자가 심심찮게 온다.

밖으로 나오니 스페인이나 그리스 지방처럼 아침부터 강하게 내리쏟는 햇살이 눈이 부시다. 바야흐로 우리나라도 열대날씨로 바뀌는 중인가.

건널목에 설치된 그늘막에 들어가 햇빛을 피하며 지자체의 섬세한 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며칠 전 양산을 샀다. 양산이라고 해야 우산과 병용해서 쓸 수 있는 심플한 디자인이지만, 내 돈을 주고 양산을 산 것은 처음이다.

평생 양산을 쓰지 않고 살았다. 이상스럽게도 양산은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유럽여행을 갔을 때 양산을 쓴 우리 팀을 재미있게 바라보던 그곳 사람들의 시선에, 왠지 양산을 쓰는 것이 멋쩍어졌었다. 양산을 쓰는 이유가 피부가 검게 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피부가 흰 그들은 정작 햇빛아래 과감하게 노출을 하고 다니는데 마치 양산을 쓰는 것이 피부가 희지도 않으면서 흰 피부를 갖고 싶다는 욕심으로 비춰지는 것 같아 그 뒤론 손그늘로 햇빛을 가릴지언정 양산쓰기를 기피하며 살았다.

그런데 매년 여름철 폭염이 계속되면서 양산이 필수적인 햇빛가리개로 떠오르고 있다. 그늘막의 그늘처럼 땡볕에선 양산의 그늘도 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양산을 쓰면 도움이 되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자외선이 차단돼 피부질환이나 여름철 온열 질환을 예방할 수 있고, 탈모 방지에도 효과가 있다. 가장 확실한 도움은 연구결과에도 나왔듯, 폭염 시 양산을 쓰면 주변 온도가 3-7도, 체감온도가 10도 정도 낮아지고 땀도 17%정도나 감소한다는 것. 그러니 폭염 시 양산이 필수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분위기에 따라 최근 ‘양산쓰기’ 캠페인이 지자체를 중심으로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지난해 일본에선 ‘양산 쓴 남자’라는 캠페인을 통해 양산쓰기 운동이 시작되더니 우리나라도 서울 강동구, 대구시, 안산시 등 지역별로 양산쓰기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런데 확산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햇볕을 차단하는 기능이야말로 여름철 폭염 대응에 가장 효과적이지만, 그동안 ‘양산=여성용 제품’이라는 인식이 남성들을 선뜻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면 양산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 필요한 도구이다. 여름철 온열환자는 남성이 여성보다 2-3배 정도 더 많은데, 그 이유가 남성은 열을 내는 근육량이 더 많고 여성은 피부로 가는 혈류량이 적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이 피부온도가 차이가 나고 결과적으로는 남성이 여성보다 열에 약한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남성이야말로 햇빛 속으로 나갈 때 여성처럼 양산이나 모자로 햇빛을 가려야 하는데, 양산이 마치 여성의 전유물이자 미용도구처럼 인식되다보니 기피물건이 된 것이다.

이런 것은 생각의 차이다.

비가 오면 누구나 빗물을 막기 위해 우산을 쓰지 않는가. 우산을 쓰는데 남녀의 구별이 있는가. 자외선을 쏟아놓는 햇빛도 마찬가지다. 양산은 자외선을 막기 위해 쓰는 것이다. 자외선이 남성 여성을 구별해서 쏟아놓는 양을 달리 하진 않는다.

다행히 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남성도 조금씩 양산을 구매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쇼핑몰 ㅇㅇ번가의 양산 매출이 7월19일부터 8월1일까지 전년 동기대비 235% 증가하였으며, 남성 거래액도 175% 증가하였다고 하니, 본인이 쓰기 위해 산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일단 한국남성들 사이에서도 양산 구입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양산이 불편하긴 하다. 분실도 많을 테고. 비오는 날 우산을 들고나갔다가 잃어버린 것이 한 두 번인가. 그러나 심상치 않게 더워지는 온난화 현상에서 양산이 자외선을 막고 피부암이나 온열질환을 막기 위한 대비책이 된다면 남자도 ‘양산 쓴 멋쟁이’ 가 되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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