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일보와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매월 첫째·셋째 주 목요일 오후 3시 동양일보 지하 아카데미홀에서 ‘동양포럼 목요 공개강좌’를 열고 있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용환 충북대교수가 각각 ‘장수개벽을 철학한다’, ‘장수사회의 윤리’, ‘장수의 교육’을 주제로 강좌를 담당한다. 이 글은 유 위원장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1. 학습권과 교육권



먼젓번의 ‘나이 들어도 배우기’에서, 배우기와 가르치기는 손바닥과 손등 같은 관계로서, 삶이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사람은 배우며 가르치며 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작용은 나이가 어리고 젊고 늙음에 상관없고, 높고 낮고 귀하고 천함의 신분에 상관없고, 반드시 선생이 후진을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가 어른을 가르치기도 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상호관계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가르치기인데, 우리는 참으로 교육을 어지간히도 힘쓴 겨레요 나라입니다. 식민지 시절에는 독립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교육에 힘썼고, 광복 후에는 국가재건을 위하여 열심히 교육하였습니다. 일본이 1면(面)1교(校)의 소학교 설치를 생색냈지만, 우리는 독립 후에 산촌(山村)에도 1면에 7개교를 설치한 고장이 있을 만큼 교육에 치중하였고, 중학교의 1면1교를 거의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고등하교를 나오지 않으면 군대도 못가는 세계최고의 학력(學歷)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네스코의 ‘학습권’을 견주어보면, 우리는 크게 뉘우치게 됩니다.

a. 학습권(The Right to Learn, UNESCO, 1985)

‘학습권이란 읽고, 쓰는 권리이며, 질문하고 분석하는 권리이며, 상상하고 창조하는 권리이며, 자기 자신의 세계를 가늠하고 역사를 만드는 권리이며, 교육의 방법을 획득하는 권리이며, 개인 및 집단의 역량을 발전시키는 권리이다.

The right to learn is: the right to read and write; the right to question and analyse; the right to imagine and create; the right to read one’s own

world and to write history; the right to have access to educational resourc- es; the right to develop individual and collective skills.

여기에서 처음의 ‘읽고 쓰는 권리’는 문제가 없습니다. 초등학교 단계의 우리 교육은 선진국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질문하고 분석하는 권리’부터는 벌써 우리는 자신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부모가 아이의 질문을 거부하고 귀찮게 여기며, 심하면 야단치고 꾸중하기까지 하는 사례를 우리는 수없이 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문과 질문이 많은 아동과 학생시절에, 이렇게 막혀버리면 당연히 분석하는 능력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상상하고 창조하는 권리’인데, 만화책을 못 보게 하고 빼앗아 불에 던지는 부모들, 공상하는 것을 쓸데없는 것이라고 야단치는 가정에서, 과학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얻고 깨치고 터득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다음에 ‘자기 자신의 세계를 가늠하고 역사를 만드는 권리’인데, 한국의 고등학교나 대학의 초기단계에서 이 문제를 이루었다는 학생이 얼마나 되는지, 제가 대학의 총장으로 있을 때 만난 이런 상황의 부적응 지진학생이 적지 않다는 데서 우리는 공허감을 느낍니다.

다음에 ‘교육의 방법을 획득하는 권리’인데, 부모가 성급하여 천편일률로 강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학교 선생까지 부추겨 과외 학원공부로 내몰아서, 자나 깨나 중압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서, 자기교육력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지, 저는 지금의 사교육 편중이 가져오는 가장 무서운 해독이 ‘자기교육력 상실’이라는 인간능력 문제라고 생각하여 아주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끝으로 ‘개인 및 집단의 역량을 발전시키는 권리’인데, 우리나라 교육의 전 과정, 특히 고등학교와 대학의 과정에서 이러한 지도성과 봉사정신을 얼마나 유념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지 불안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교육권은 권리이면서 오히려 의무라는 것으로 규정되는 것이며, 교육과 학습이 정규적 과정에서 왜 이렇게 부실(不實)로 일탈하여서, 그 결과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하여 봅시다.

b. 입시위주교육으로 빚어진 청소년 문제

입시위주교육으로 빚어진 청소년 문제는 다음과 같은 참으로 심각한 것인데, 부모의 눈에는 이런 것이 보이지 않고, 알아도 그 위험과 농도(濃度)를 깨닫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홀로서기 못하는 지진아 만들기: 학부모의 지나친 간섭이나 통제, 또는 과잉보호로 홀로서기에 실패하여 시키는 대로 겨우 움직이는 청소년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과서외우기에 머무는 저능아 만들기: 교과서 외우기가 학습의 전부인 체제가 모든 청소년을 저능아로 만듭니다. IQ 90이면 교과서를 외울 수 있다는 것이 교육심리학의 결론인데, IQ 130-150의 고지능학생은 교과서 외우기의 단조로움에 흥미를 잃고 마침내 일탈합니다. IQ 130-150의 고지능학생은 그 능력만큼 가르쳐 주어야 평등교육입니다.

자기만 아는 부적응아 만들기: 그래서 교과서 외우기가 교육의 전부인양 곡해하여, 참교육의 필수불가결의 조건—마음과 뜻의 도야(陶冶), 도의와 예법과 정서 등의 기초적 인성교육을 하지 않아 사회적 부적응아로 만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잉보호는 자식의 성장 발달을 막는 최악의 환경!’이라는 경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c. 몰개성(沒個性) 획일화(劃一化)로 억색하는 청소년

그래서 우리의 사랑하는 청소년들이 획일화된 교육풍토에서 개성이 무시되고, 그들의 황금기인 ‘질풍노도의 시기’의 청소년기를 빼앗기고 얼마나 목마른가를 미루어 살펴보고 메꾸어 주는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대화의 상대가 없는, 동일화 감정의 외톨이: 우리의 청소년은 선배가 없고 스승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동일화에서 외톨이입니다.

본받을 사람이 없는 정신적 방황: 자기가 본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고독감과 함께 방황을 가져옵니다. 옛날의 선인들은 현세의 스승이나 벗에 한하지 않고, 상고(尙古)라 하여 역사적인 고사(故事)를 통하여서도 배우고, 상우(尙友)라 하여 성현군자를 우러르며 벗하기도 하였습니다.

상의할 사람이 없는 심리적 고독: 제 고민을 터놓을 사람이 없고, 상의할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정신적(精神的) 지주(支柱)가 없는 고독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여 저는 1995년에 KBS-TV의 인기프로 ‘아침마당’의 초창기에 초빙되어서, 전국의 학부모에게 가정교육에서의 ‘무(無)교육/ 비(非)교육/ 반(反)교육’이라는 뼈아픈 충고를 하고 시정을 호소한 바 있습니다.

무교육은 어머니의 품과 가정에서 반드시 가르쳐야 할 기본생활습관을 가르치지 않은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예의범절에서부터 숟가락 젓가락질 하는 것도 안 가르친다면 자녀는 삶을 어떻게 꾸려갑니까?

비교육은 가르쳤다는 것이 사실에 있어서 잘못된 본보기로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무의도적으로 자식 앞에서 보인 일들입니다. 예컨대 어머니가 어린이의 손을 잡고 횡단보도가 아닌 길을 잘라가거나, 빨간 신호등에고 불구하고 건너가는 일, 아버지가 자전거 짐바지에 아들을 태우는 일이며, 밥상머리에서 아이들이 있는데도 담임선생의 욕을 하는 따위는 최악의 비교육일 것입니다.

반교육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거침없이 감행하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과외로 학원보내기를 많을수록 좋다는 일부 학부모들의 무모와 방종입니다. 학원과외를 아홉 군데나 보낸 사람이 있었다는데,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학대이며, 부모의 극단적 허영심의 발로이고 또한 무식의 소치일 것입니다.

그런데 딱하게도 그 후 20여년 사이에, 그런 ‘무(無)교육/ 비(非)교육/ 반(反)교육’상황이 개선되기는 고사하고, 이제는 학교교육까지 ‘무(無)교육/ 비(非)교육/ 반(反)교육’이 번지고 있어서, 이 무교육의 교육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개탄하여 마지않는 것입니다.



2. 교육의 참뜻

우리는 지금 교육의 본질을 잊고 잃고 있다는 상황을 봅니다.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과 꼭 가르쳐야 할 것을 안 가르치고, 엉뚱한 일에 빠져서 헛물만 켜고 있습니다.

옛날 서당에서 가르친 ‘천자문’의 다음 순서인 ‘동몽선습(童蒙先習)’의 개권(開卷) 첫대목은 오륜(五倫)—부자유친(父子有親)하고 군신유의(君臣有義)하고 부부유별(夫婦有別)하고 장유유서(長幼有序)하고 붕우유신(朋友有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펴고 있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만 가지 무리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 그 귀한 까닭은 오륜이 있기 때문이니라.’ 지금의 우리 교육은 그 오륜의 값어치를 군주주의와 봉건주의 구시대의 유물이라 일고(一顧)의 가치도 없다는 식으로 무시하고 있습니다. 고전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적용할 가치와 필요가 있다는 유연한 수용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육에는 윤리교육이 없습니다. 아니 과목으로는 세계에서도 드물게 ‘도덕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초기본의 생활습관과 실천이 빠져버린 것이어서 교과서만의 것이고, 그것마저 암기과목으로 변질 전락하여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a. 목적주의 출세주의 교육의 결과

교육이 본질을 잊고 외면하여, 출세주의 목적의 입시위조교육으로 치닫고 있으니 딱합니다. 입신출세를 위한 과거제도의 역사가 천년을 넘었으니 그 전통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으나, 정작 예날 과거공부는 수신과 제가(修身齊家)로 시작하였습니다.

b. 본보기로써의 교육

교육은 본보이고, 이끌어 내고 끌어올리는 것이며, 특히 기초교육의 과정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틀이 잡히는 것인데, 그 부모형제 관계를 없애버리고, 남에게 맡기는 위탁교육 위주로 나아가니, 질서는 깨지고 윤리는 망가지는 꼴이 되었습니다.

c. 고학력(高學歷)사회의 학력(學力) 반성

여기에서 우리는 학력(學歷)이 그렇게 높지만, 능력(學力)은 의심스럽다는 상황을 시인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학력은 간판만의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학력을 지식 기능적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정서적 의지적 영역에다가가 도덕성까지를 아울러야 독립인격의 능력 곧 참다운 학력(學力)이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교육 현실은 이런 상황과 공존하고 있습니다.

대학은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데가 많은데, 입시위주교육은 초등학교 과정에까지 번지어 내려 있고, 학습관/ 학력관/ 능력관의 세계적 수준을 외면하며, 특성과 개성을 무시하는 방법으로 교육기능(機能)이 점점 저하하여 갑니다.

정녕, 비전도 소망도/ 이상도 희망도/ 철학도 도덕도/ 가치도 규범도 없이 사는 인간을 양산하면서, 그것을 기르고자 하는 인간상(人間像)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3. 교육 주체(학부모와 교사)들의 교육관과 교육방법의 문제

태교까지 했던 선대(先代)의 세계적 수준의 가르치기가, 품안의 교육을 포기하고, 인성교육을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는 학부모와 교사들 곧 교육주체들의 교육역량에도 관심하여야 한다는 필요를 절감합니다.

가르치기는 청소년이 대상이라고 단정하기 쉬우나, 우리의 상황은 학부모인 중간세대가 자랄 때의 무교육과 그들이 재연(再演)하는 무교육의 반복문제에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교육과 비교육과 반교육으로 성장한 세대가 그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배운 대로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학부모와 교사가 많다는 사실이 우리들 선배들이 가르쳐야 할 관심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에게 아주 새롭고 특징적인 기획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일—한국에서 처음이고, 동양권 다른 나라에도 선례(先例)가 없으리라고 보는 ‘장수사회 대비교육의 탐색’ 한일(韓日) 학슬회의를 9월 하순에 3일간의 일정으로, 청주교육대학교 주최, 동양포럼 주관으로 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실련(인성교육실천연합회) 충북회장인 윤건영 청주교육대학교 총장과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의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창안되고 전개하는 것인데, 교육주체인 교원의 양성과정과 현직교원의 재교육과정에서 장수사회를 대비하는 인성교육을 강화한다는 목적이라, 환영하고 치하하여 마지않는 것입니다.

a. 본질이 무시된 교육—인성: 지식/ 인격: 점수의 부조화

교육 안에 인성교육은 함께하는 것인데, 인성교육을 교육에서 떼어서 생각하는 잘못에다가 지식을 위주로 하고 인성교육을 무시하고 소홀히 한 잘못으로, 지식을 인격으로 착각한 대표적인 상황이 시험중시사회(testcracy)의 왜곡(歪曲)된 도입입니다. 공정선발 등용과 육성의 testcracy가 우리나라에서는 scorecracy 곧 점수벌레로 변질되고, 그래서 우등생이란 서열주의 선수로 비하됩니다.

b. 어떤 외국의 학교교육 4대 중점

일본이 1980년대 초부터 내세운 ‘학교교육의 4대 중점’에 저는 주목하여 왔습니다. ‘자기교육력의 육성, 기초기본의 철저, 개성과 창조성의 신장, 문화와 전통의 존중’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일본 보통교육의 수준을 헤아려보기 바랍니다.

일본과 미국은 1980년대에 두 나라의 교육을 상호비교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은 미국교육을, 미국은 일본교육을 연구하여, 1987년 1월에 일본측 보고서와 미국측 보고서로 내놨는데, 그 평가와 파장은 지면관계로 서술을 생략하겠습니다.

c. 문화실조(cultural deprivation)의 치유—독서체계의 회복

우리나라 농촌학교뿐만 아니라 입시위주교육에 매달려 있는 대도시 학생들조차도 문회실조라는 상태에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문화 환경과의 접촉기회를 잃은 탓으로 사회적 적응이 어려운 심리상태입니다. 전시회장이나 음악회장이나 강연회장이나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경기장을 지나면서고 거기에 들어가 보거나 들을 줄을 모르는 청소년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배우기의 동기화—호기심을 생각할 때 매우 서글픈 일입니다.

그 치료의 가장 손쉬운 방법이 간접경험으로써의 독서인데, 이것마저 독서체계라는 방식이 깨져있는 것입니다. 독서의 시작은 만화이고 다음이 동화이고 소설이고 학술서의 개론서로 발전하는 것인데, 만화 부르게 하여 동화읽기로, 동화 부르게 하여 소설 읽기로 나아가야 하는 것을 못 읽게 하고 막아버리는 바람에 개인의 독서체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빚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4. 성현들의 교육법

공자와 맹자 그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자녀교육에 관한 말씀을 보여드렸습니다마는, 지면 관계로 서술을 생략하겠습니다.



5. 훈육(訓育)으로 인성교육을 회복

끝으로 저는 꾸짖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는 뜻으로, 둬 가지 선인(先人)의 말씀으로써 오늘의 ‘나이 들어도 가르치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a. 유영(柳永, 호는 屯田, 사(詞)의 대가(大家)의 권학문

중국 송나라의 유영(柳永)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린 권학문에서 이렇게 남겼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름에 가르치지 않으면 이는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비록 가르친다 하여도 엄하지 않으면 이 또한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가 가르치는데 배우지 않으면 그 자식은 제 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비록 배운다 하여도 힘쓰지 않으면 이 또한 제 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 기름에는 반드시 가르쳐야 하고, 가르침에는 반드시 엄하여야 하고,

엄하면 반드시 힘쓰게 되고, 힘쓰면 반드시 이루는 것이다.

배우면 서민이 군자가 될 수 있고, 배우지 않으면 군자의 자식도 서민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엄하기’는 ‘철저함’이지 결코 무섭고 두렵게 함이 아닙니다. 참다운 친구는 엄하게 충고하였고, 참다운 충신은 목숨을 걸고 왕에게 직간하였는데, 부모가 자식을 꾸짖지 않는다면 무슨 교육이 되겠습니까?

b.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육아일기 ‘양아록’

이문건 옹의 종아리 치는 회초리는 체벌과 폭력의 도구가 아니라, 교육평가의 척도이며, 울면서 때리는 사랑의 매입니다. 사랑스러워서 울고 안쓰러워서 울고 귀여워서 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나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고, 존친(尊親)의 꾸중을 법으로 다스린다는 인권주의라면, 저는 그런 인권론을 반대입니다.

‘—종아리를 때림(撻腿一下)/

—꾸짖고 나서(責兒吟)/

—종아리를 때리고 나서(撻兒嘆-撻而誨之)‘

자식교육에서 꾸짖지 않는 교육은 가르치기가 될 수 없고, 방임하는 것은 온정주의는 건사랑입니다.



이 글을 맺으면서 교육 기능의 분담 체제를 생각하여 봅니다. 가정에서는 인성교육을 회복하여야 하고, 학교에서는 지식/ 직업교육을 회복하여야 하고, 사회에서는 질서/ 문화교육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니, 나이 들어도 가르치기에서 여러분 어른들의 구실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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