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논설위원 / 침례신학대 교수

(동양일보) “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심훈의 <그날이 오면> 1연이다. 광복의 그날에 대한 기대가 절절한 시이다.

​ 생전,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할아버지는 일본공출을 가끔 말씀했다. 전쟁물자 대려고 쇠라는 쇠는 지독하게 다 뒤져갔다고, 곡식과 가축도. 나뭇간 밑도 밭 구덩이도 뒤졌다고. 어머니는 일제 말기에 선생님이 걸을 때면 철컥철컥 소리가 나는 칼을 차고 공부를 가르치는 소학교에 다녔다고 회상한다. 우리 부모가 몇 년 일찍 태어났더라면 비극의 인물이 될 시대였다는 사실은 끔찍하다. 아버지는 징병으로 끌려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일본과의 악연은 끔찍하다. 끔찍한 이웃나라는 백년 전만이 아니라 지금도 또 경제전쟁이라는 프레임으로 도발 중이다.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시민들의 구호와 자발적 불매움직임은 백년 전의 침략과 현재의 경제도발 역시 침략으로 보겠다는 걸 의미한다. 일본이 새로운 문물을 가지고 와서 근대화를 앞당겨주지 않았느냐고 조선 왕조보다 나았다는 말은 강제 침략 미화 궤변이다. 그런 논리는 기차, 전기, 통신, 도로, 상가 자동차들을 예로 든다. 이것들은 안방까지 빼앗은 누군가가 자기 쓰기 좋게 방 한구석에 가져다 놓은 베개나 방석 재떨이 쓰레기통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 안방 빼앗긴 은혜라도 갚자는 말인가 역으로 물어야 한다.

1906년 5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은 온전한 땅이 없고 기력이 남아있는 사람이 없으며 열 집에 아홉 집은 텅 비었고, 천리 길에 닭과 돼지가 멸종하였다”라고 기록해 두었다. 근대사 연구들에 의하면 일본은 철로가 놓일 기반을 만들려고 농번기에도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다 써서 유랑민이 속출하고, 가축과 식량을 강제로 징발해서 인근 농촌은 텅 빈 곳이 늘어갔다. 경부선이 통과하는 역 주변에는 일본 낭인과 민간인들이 들어와 잡화상, 여관, 미곡상 등을 하면서 상권을 형성하면서 부를 독점해 나갔다고 한다.

우리 문학사에서 이광수와 최남선의 2인 문단시대는 일제 강점기에 계몽을 내세웠다. 망한 나라를 통탄하며 백성들이 우매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열망을 글로 써서 계몽했다. 그 중에 최남선의 ‘경부철도가’라는 창가가사가 있다. 경부선이 지나는 곳의 풍광을 노래하기 좋도록 운율을 맞추었다.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권을 잃은 나라의 젊(다기보다 어린)은 청년은 화려함 이면의 수탈은 보지 못했다. 새로운 문물의 편리에 압도당해서 만주에서 러시아와 싸울 일본군 병참수송에 쓰려고 경부철도를 건설했다는 진실을 볼 안목이 서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천한 역사인식의 바닥, 마침내 도달한 논리의 허방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더 많이 얻어내자는 결론이다. 당대의 지식인들 중 변절한 이들이 걸은 길은 대체로 이 과정을 거친다. 이광수도 그랬다. 그들은 계몽도 진심으로 했고, 변절도 진심으로 했을 것이다. 진심이면 능동적으로 황국신민이 되자는 말도 용납되는가. 진정성은 모든 과오를 덮는 만능패스포트인가.

백년이 지난 지금 일본이 우리에게 해준 것도 많다고 말하는 이들, 일본이 근대화를 앞당겨 줬다는 이들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을 다시 보아야 한다. 천 팔백년대 호적을 가진 평범한 촌 노인 우리 할아버지가 일부러 지어내 일본 공출을 이야기했을 이유는 없다. 우리 선조들을 맘대로 끌어다가 제 전쟁준비 했던 증거물인 그 기차 따위는 일본이 우리에게 베푼 선물이 아니라 뒤틀린 근대성의 상징이다. 거기서 고마움을 찾으려는 것도 뒤틀린 근대정신이라고 할 만하겠다. 잘못된 역사에서 놓여난 날,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고 한강물이 일어나 용솟음치는’ 기쁜 광복의 날이다. 우리 땅의 흙이라도 다시 만져보아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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