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희 논설위원/소설가/한국선비정신계승회장

강준희/논설위원/소설가/한국선비정신계승회장

(동양일보)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보노라면 ‘민나 도로보’란 일본말이 생각난다.

‘민나 도로보’란 일본어로 전부 도둑이란 뜻이다.

누구 못지않게 일본을 싫어하는 필자가 일본어를 써서 미안하지만 만 부득해 쓰니 양해 있기 바란다.

이 ‘민나 도로보’는 친일파로 유명한 공주(公州) 갑부 김갑순이 써서 유명해졌는데 본시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가리켜 써온 말이다.

그들은 한국인(그때는 조선인)을 ‘민나 도로보’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조선인)과 북어(명태)는 두들겨 패야 된다는 말귀로 서슴지 않고 해 우리 한국을 경멸했다.

그렇다면 왜 일본인들은 우리 한국인을 도둑이라 했고, 북어와 한국인은 두들겨 패야 된다고 했는가.

우리는 이를 알아야 하고 또 이 말이 나오게 된 동기와 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조센징과 ‘민나 도로보(조선인은 모두 도둑놈)’, 일본인들은 그 때 적어도 한국인을 모두 도둑으로 보았다.

안 그렇고야 어찌 이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는가. 이는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확연히 드러나 아, 과연 그렇구나 함을 실감케 한다.

쇠털같이 수많은 날 뇌물 운운하지 않는 날이 없고 어느 한 날 사기 쳤다느니, 돈 떼어먹고 달아났다느니 하지 않는 날이 없기 때문이다.

신문 방송에 보도되지 않는 부정 비리(정확히는 도둑질)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어서 구우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이럴 때마다 셜록 홈즈라는 탐정소설을 쓴 저 영국의 추리 작가 코난 도일의 일화가 생각난다.

코난 도일이 어느 날 장난기가 발동해 부패한 관리가 부정한 명사들에게 전보를 쳤다. 전문은 ‘탄로 났다 튀어라’였다.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코난 도일은 장난기가 발동해 심심파적으로 전보를 쳤는데 전보를 받은 당사자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모두 도망쳤다. 만일 이것이 영국 아닌 한국에서였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났을까.

지금 이 나라엔 가슴 졸이며 발을 제대로 뻗지 못한 채 자는 사람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어디서 전화만 걸려 와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누가 뒤에서 부르기만 해도 깜짝 깜짝 놀라는 사람도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다.

깨끗하다는 것, 당당하다는 것, 떳떳하다는 것, 이 세상 어천만사 중에 이 세 가지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는가.

조선조 영조 때의 청백리 유정원(柳正源)은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지만 고을을 떠날 때는 언제나 채찍 하나였다.

성종 때의 청백리 이약동(李約東)도 제주 목사로 있다 그 곳을 떠날 때 채찍 하나만 달랑 들고 떠났다.

그러나 이 채찍도 이 섬(제주)의 물건이라 하여 관아의 다락에다 도로 놓고 왔다.

태조에서 세종이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35년이나 벼슬길에 있던 유관(柳官)은 비가 새는 집에서 왕이 하사한 일산을 받고 살았다. 그러며 걱정하기를 “이 비에 우산 없는 집은 어떡할꼬”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부인이 “우산 없는 집은 다른 방도가 있겠지요”했다.

성종 때 도승지 손순효(孫舜孝)는 죽을 때 자식들을 불러놓고 가슴을 가리키며 “이 애비 가슴 속에 더러운 것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다. 너희도 그렇게 살아라”하고 눈을 감았다.

역시 명종 때의 청백리 박수량(朴守良)이 죽자 임금은 그의 무덤에 비(碑)를 내렸다. 그런데 그 비는 글자 없는 백비(白碑)였다.

너무도 청백하게 살아 비에 비문을 쓴다는 게 오히려 더럽다 하여 백비를 세웠던 것이다.

‘민다 도로보’는 일본인들이 그냥 붙인 말이 아니다. 겪고 또 겪은 끝에 붙여진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이 되려면 ‘민나 도로보’라는 불명예부터 절치부심 씻어야 한다.

그러기 전엔 우리가 일본인들이 경멸조로 부른 ‘민나 도로보’란 오명을 지울 길이 없다.

‘민나 도로보’. 이를 우리는 국치(國恥)로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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