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노인’ 김광혁 신부를 만나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일보와 동양포럼운영위원회는 장수사회의 새로운 노인상 정립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공부하는 노인’ 김광혁(82) 신부를 지난 7월 22일 청주시 서원구 개신동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팔순을 넘긴 현재도 끊임없이 책을 읽으며 탐구하고, 라틴어·이태리어·영어·독일어 4개 국어로 성경 필사에 몰두하고 있는 김 신부의 이야기를 듣는다. <편집자>



-한글도 아닌 라틴어, 이태리어, 영어, 독일어 4개 국어로 성경 필사를 하는 이유가 있는지요. 필사를 하면서 깨닫는 바가 많다고 하셨는데 어떤 점들이 새로운가요.



“평생을 성경(말씀)과 함께 살아온 신부로서 말씀 한 구절이라도 빠뜨리지 않고 온전히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에 성경 필사를 시작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성경의 내용을 신자들에게 틀리지 않고 잘 전달하는 데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 말씀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생활 속으로 가져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성경이 주는 가르침이 머리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려오고, 가슴에서 배로 다리로, 그렇게 온몸으로 느끼고 실천하는 단계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늘 아쉬웠습니다. 그러다 은퇴를 하고 노년이 돼서야 비로소 말씀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전에는 사제로서 성경 구절의 정확성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말씀을 온전히 보여주는데 오히려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부담감에서 해방됐습니다. 같은 성경 구절이라도 예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더 깊이 있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습니다. 이게 바로 공부하는 기쁨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성경필사가 주는 기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필사에 몰두 하다보면, 오늘 하루,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되고 내일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순간 사라지게 됩니다.”



-스스로 노인의 가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고령사회라면 우선 건강한 노년의 문화와 철학이 있는 사회일 것입니다. 노인은 그 시대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문화입니다. 노년층의 대부분 문제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납니다. 자기만의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우울증이나 질병, 죽음에 대한 공포 등으로 알코올에 의존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노인에 대한 정의도 달라져야 합니다. 노인을 ‘죽음에 가까이 가 있는 나이든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면 사회적 부담으로만 남게 됩니다. 무기력하고, 무가치한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노인이 고루하고, 편협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무기력한 사람이라는 왜곡된 모습으로 비춰지기보다는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 남겨줄 것(유산)이 있는 사람’으로 인식될 때 올바른 관계가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것은 정책적인 문제도 있지만 노인들 스스로 자신을 방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노인의 역할을 제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가 마련돼 있지 않고, 노인다운 ‘노인’이 많지 않다는 게 우리 사회의 큰 문제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크게 감명을 받았던 ‘노인상’이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때는 6.25전쟁이다 뭐다 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생활이 많이 곤궁할 때였습니다. 미군들이 지프차를 타고 다니다 아이들을 만나면 장난삼아 초콜릿을 던져주곤 했습니다. 배고픈 아이들이 그것을 하나라도 더 줍기 위해서 기를 쓰고 차 꽁무니를 쫓아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흰 두루마기를 입은 한 노인이 “네 이놈들, 너희들이 거지냐”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아직도 그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요즘에는 ‘네 이놈들’이라는 말도 잘 쓸 수 없는 사회가 됐지요. 잘못된 것에 대해 호통치고, 가르쳐 주던 ‘어른’은 사라지고 무기력한 노인만 남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참 안타까워요. 최근에 본 동물 다큐멘터리가 생각납니다. 아프리카 어느 지방의 일입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하루 종일 코끼리 떼를 쫓는 일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코끼리 떼가 마을까지 내려오는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최근에는 코끼리가 떼로 몰려와서 농작물과 집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빈번해져서 마을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는 것입니다. 급기야 마을 사람들이 한 동물연구가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동물연구가의 진단에 의하면 밀렵꾼들이 어른 코끼리를 다 잡아갔기 때문에, 어린 코끼리들이 어른의 도움 없이 제멋대로 자라는 과정에서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즉시 다른 지역에서 어른 코끼리를 공수해 와서 무리 중에 풀어놓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이후로 어린 코끼리들이 마을로 내려오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사례에서 보듯 어른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노인들이 많을 때 사회가 안정되고, 노인들의 삶도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노인의 위상과 자긍심을 회복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누군가 자주 그런 동기부여의 장을 마련해주고 이에 노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자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가르침이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가슴에서 배로, 다리로 내려와 생활화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온몸으로 배우고 깨달아 실천함으로써 삶이 더 풍요롭고 깊어진다는 말씀인지요.



“종교에 있어서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머리의 지적작용을 통해서 내 지성이 동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이 가슴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진리를 자신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신심’이라고 합니다. 신심이 배로, 즉 몸 전체로 내려가서 실천에 옮기는 최종 단계를 ‘성덕’ 즉 ‘덕행’이라고 하지요. 종교인 중에서도 머리와 가슴까지 내려온 사람들은 많지만, 불행하게도 성덕을 이루는 사람은 드뭅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들은 많지만, 지성까지 갖춘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늙었지만 이제라도 그 길을 찾아가는 의미에서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4개 국어로 성경을 필사하다보면 문화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부분도 있는지요.



“성서의 기본은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4개 국어로 필사를 하다 보면 표현 방법은 다 다르지만 결국은 인간을 완전성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나이 들어 깨닫게 된 것이 있는지요.



“내가 너무 이론적, 논리적으로만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작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읽었던 책 중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청년이 죽어서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너는 왜 네가 못돼서 왔니”라는 물음을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나’가 되는 것이 비로소 완전한 사람이 되는 일인데, 그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노년에 느끼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부실했던 내 삶을 이제라도 채워야겠다는 것 말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나’가 되는 일이죠. 우리 사회에서 자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극히 드뭅니다. 전부가 다 남의 삶을 모방해서 살고 있습니다.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그저 서구의 삶을 그대로 모방해 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적 사고에 젖어 오로지 부자의 삶을 모방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의 삶을 살자’, 이게 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노년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가는 것이고, 익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늦게나마 깨닫게 됐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삶을 모방하며 사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완전한 것을 추구하다 보면 완전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만 불완전한 것을 따르다 보면 불완전한 삶이 됩니다. 완전성을 갖춘 절대자를 닮으려는 노력과 불완전한 사람들의 삶을 경쟁적으로 흉내 내며 사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소망이 있는 데 그 첫 번째가 ‘장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고통과 죽음이 없는 싱싱한 생명을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면제된 생명은 없습니다. 두 번째 소망이 ‘진리’를 터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류가 없는 완전한 진리를 원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세 번째가 ‘사랑’입니다. 사랑 역시 상처나 이별이 없는, 증오나 질투가 없는 늘 황홀한 사랑을 원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소망하는 세 가지, 즉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 완전한 사랑의 근원이 곧 하느님이시며, 바로 그분을 닮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어지는 것이 행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닮고 싶어 하는 존재는 연예인처럼 인기 있고 세속적인 것. 표면적이고 찰나적인 것인데, 젊은이들이 올바른 대상을 선택하고 따르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요즘의 젊은 세대는 좋은 평가를 받아보지 못한 세대입니다. 과연 우리가 젊은 세대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할 자격이 있는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는 젊은 세대가 아닌 우리 기성세대가 만든 것입니다. 그들이 본받을 만한 우상이 돼주지도 못했습니다. 우리 세대는 그래도 공자와 같은 성현들의 영향을 받고 자란 세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위를 향해서는 무조건 밟고 올라가는 것이 출세라고 배웠고, 앞을 향해서는 그저 앞다퉈 뛰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존경받는 모델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아까 얘기한 어린 코끼리들처럼 기성세대를 여과 없이 닮아갈 뿐입니다. 따라서 젊은 세대와 얘기할 때 우리는 우리 잘못부터 얘기해줘야 합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산다면 우리보다 훨씬 더 불행한 노인세대가 될 거라고 진정성 있게 알려줘야 합니다.”



-노년의 행복한 삶과 공부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요.



“자칫하면 지루하게 보낼 수도 있는 노년을 보다 활력 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공부하자’라고 자주 이야기를 합니다. 노년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공부입니다. 그것이 어떤 분야가 됐든. 노년이 돼서 하는 공부는 젊었을 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흔히 ‘공부해서 남 주나’하는 말을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스승이 제자에게, 어른이 학생들에게 하고 있는 말입니다. 경쟁사회에서 남보다 앞서가기 위해서, 내 것으로 만들라는 충고이자 독려입니다. 그러나 공부는 사실 ‘남 주기 위해서’ 할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노년의 공부가 그렇습니다. 우리사회의 많은 노년층을 보면서 너무나도 많은 인재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혜라는 유산이 그냥 방치되고 있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갖습니다. 알고 있는 지식이 경험과 어우러져 올바른 깨달음으로 농축된 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합니다. 그 지혜를 공유하고 남겨주어야 하는 것이 노인의 역할이며, 노인의 존재이유이며, 여유로움 속에 노년의 가치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노인의 공부’라고 믿고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필사하고, 공부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깨달으신 것처럼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점차 세상도 바뀔 것 같습니다.



“생명력 있는 사회는 하나가 하나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민들레 씨앗처럼 퍼지고 또 번져 나가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우리 사회가 좋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하고, 젊은이들이 좋은 변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끈기 있게 기다려 줘야 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닦을 수(修)’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닦고, 익히고, 연구하고, 고치고, 손질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닦을 수(修)’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젊은이들에게는 그 필요성을 심어주고, 장년들에게는 그것을 실천하도록 격려하고, 노년들은 삶으로서 보여줘야 합니다. 이것이 ‘닦을 수(修)’가 가진 함의(含意)며 제 공부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노년의 삶은 평생을 쥐고 살아온 것들이 어떤 가치로 세상에 남을 것인가 묵상하며 살아가는 시기입니다. 저 역시 비록 보잘것없는 노인이지만, 올바른 인생 후반기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늘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양포럼’과 같은 이러한 활동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제 얘기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광혁 베드로 신부는….

1965년 사제가 된 이래, 독일유학을 비롯하여 청주교구에서 43년간 사목활동을 마치고 2007년 은퇴, 은퇴 사제로서 현재 청주에 거주하고 있다.

<정리 박장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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