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 ESI 교장

한희송/ ESI 교장

(동양일보) 미국 공화당(GOP) 출신 첫 대통령으로써 링컨(A. Lincoln)은 노예제가 역사의 흐름으로부터 미국을 이탈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묵과할 수 없었다. 천부인권론이 흑인을 대상화할 수 없다는 의견과 또한 그에 관한 논쟁이 미연방을 와해시킬 근거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링컨은 오히려 역사의 퇴보를 조장한 인물이 될 터이었다.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의 자의적 연방탈퇴가 미국의 헌법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해석을 수용하는 것은 16대 대통령 링컨이 휘그당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일이었음과 동시에 1864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선택이 자신을 후보로 지명하도록 요구하는 일이었다. 이를 내외에 인식시키기 위하여 그는 1863년을 ‘노예해방선언’, ‘게티스버그 연설’, 그리고 ‘대사면 및 국가재건안(再建案) 선포’로 장식했다. 자고로 미국의 남북전쟁은 그 결론을 도출해 낼 시기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링컨은 재선(再選)에 성공했다.

민주당원이자 남부 테네시주 출신인 존슨(Johnson)을 러닝메이트로 지목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기괴한 조합으로 선거를 이긴 링컨은 자신이 미국 역사상 가장 크고 잔혹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당사자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로부터 두 달도 안 되어 링컨이 궐위(闕位)되자 전쟁을 끝낼 책임은 결국 Johnson의 손에 주어지게 되었다. 텍사스 주의 마지막 반발을 흑인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는 조건으로 무마시키기 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을 더 노력한 끝에 미국대통령으로써 존슨은 1886년 8월 20일 미국 남북전쟁의 종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할 수 있었다.

남북전쟁은 미국의 내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인간의 자유'를 향한 역사의 여정에 그 가치를 확인한 사건이다. 노예제도의 폐지와 그로 인한 인류역사의 발전의 주요단계에서 미국의 남북전쟁이 시사(示唆)하는 바는 매우 크다. 노예와 여성은 사람이란 집합의 외부에 존재해야 했던 고전고대 시기에서부터 인간의 존재가 땅과 신분에 예속되었던 중세를 거쳐, 근대에서 그 개념을 신성화한 '자유'는 이를 현실에서 실현할 실질적 장치들을 갖추면서 현대로 들어서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의 역사는 사람의 '자유'를 어떤 개념으로 삶의 스크린에 투영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유엔 미래보고서가 밝히는 인간의 모습은 지금까지 인류가 희생을 통해 만들어오고 지켜온 자유의 개념에 의문을 던진다. 물리적 효율성을 로보틱스(Robotics)와 사물인터넷에 맡김으로써 역사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자유'를 종래 쟁취한 인류는 자발적 실업을 선택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자유의 제한요소들을 극복한다.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의 모습 때문에 '게임'보다는 '공부'를 해야 하는 현재의 불완전성이 사라지고 어렸을 때부터 그저 게임만 즐겨도 먹고사는 사회적 시스템이 있는 시대가 온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인간역사의 완벽한 승리일까? 온전한 실패일까?

우리나라의 현재의 교육은 이러한 모습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다. 경제적인 부담에서 온전히 벗어나서 하루 종일 게임을 해도 살 수 있다면 그것을 삶의 최고 '행복'으로 인식하되, 인간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주인공으로서 자신을 평가할 능력조차 없어진 상태를 오히려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람이 존재가치에 관한 철학적 인식이 없으면 과학의 발달이 가져다주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물리적 상태를 자유의 완성으로 설정한 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사고의 무능력을 조장하는 것은 인류 역사가 부단히 추구해온 자유와는 관계가 멀다. 교육은 의미가 없는 일에까지 의미를 심으려는 노력이며,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인식하도록 이끄는 일이다.

1866년 오늘은 인류역사의 흐름이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날이다. 오늘의 한국교육이 묵상하여 그 의미를 반성할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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