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나기황 논설위원 / 시인

[동양일보]볼만한 TV 프로그램이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요새는 뭘 봐도 감흥이 없다는 얘기다.

지난 주말, 새로 개편되는 프로 중에 ‘같이 펀딩’이라는 자막에 눈길이 갔다.

재밌거나 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올려 시청자(소액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하여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소위 ‘클라우드펀딩(crowd funding)’ 예능프로그램이다.

첫 회는, 대형 태극기를 걸고 결혼식을 올릴 만큼 태극기 사랑이 각별한 배우 유준상이 ‘태극기 함(函)’을 함께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한다. 결혼식장을 꾸몄던 소중한 태극기를 이사 중에 잃어버린 것이 동인(動因)이 됐다고 하지만, 이 ‘국기함 펀딩’이 과연 시청자의 참여를 이끌어

낼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고 한편으로는 태극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자는 기획 의도가 엿보인다. 르포형식으로 진행됐는데 지난 8.15 광복절에 태극기를 게양한 집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역사 강사 설민석과 함께 ‘진관사 태극기’를 만나보는 과정을 그렸다.

2009년 5월, 서울 북한산 진관사 칠성각을 복원하기 위해 해체작업을 하던 중, 불단과 기둥 사이의 공간에서 보자기에 싸인 보따리를 발견했다. 보자기를 풀자 독립신문을 비롯한 6종 19점의 신문과 문건이 들어있었다. 보자기는 다름 아닌 태극기였다. 보통은 신문지로 태극기를 감싸서 두기 마련인데, 태극기로 신문과 다른 문건을 고이 싸서 보관했다는 것은 그만큼 귀중한 자료라는 반증일 것이다. 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과 신채호가 발행한 ‘신대한’ 창간호, 불교계에서 이름으로만 전해지고 있던 ‘자유신종보’의 실물 등이 있었다. 문화재청은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 상황과 태극기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여 2010년 2월 25일 ‘진관사 태극기와 문건’을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지정했다.

이 태극기는 일제강점기에 사찰에서 발견된 최초의 태극기라는 점 외에 또 하나의 비밀이 숨어있다. 놀라운 것은 가로 89cm, 세로 70cm 크기의 면직물에 재봉틀로 박음질한 붉은색 원(圓)이 있고, 즉 일장기(日章旗) 위에 먹물로 태극문양과 네 모서리에 ‘건곤감리(乾坤坎離)’의 4괘를 그려 넣은 것이다. 의도적으로 일장기에 덧칠을 가해 자주독립의 의지를 꾹꾹 눌러 새겼다고 볼 수 있다. 이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한 사람은 당시 진관사와 인연이 깊었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초월(1878~1944) 스님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초월 스님은 그 후, 여러 차례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하게 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는 이번 8·15 광복절 74주년을 맞아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등록문화재 ‘역사 속 태극기’ 20개 중에서 16개를 선정해서 지난 14일 총 112만 장의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이 가운데 ‘진관사 태극기’가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90년 동안이나 방치됐던 낡은 태극기와 오래된 신문뭉치가 빛바랜 역사를 밝히는 보물이 된 지도 10년이 지났다. ‘진관사 태극기’가 만들어진 후 100년이 되도록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큰 아파트 단지임에도 이번 8.15 광복절에 태극기를 단 세대를 어렵게 찾는 모습이 방영됐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태극기가 홀대받고 태극기에 대한 인식이 무뎌졌을까. 아마도 박 전 대통령의 탄핵과정에서 탄핵을 이끈 ‘촛불집회’와 이에 반대하는 `태극기집회‘간 양 진영의 갈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떠한 경우라도 태극기가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을 편 가르기 위한 ’선 긋기’ 깃발로 전락해선 안 된다.

한 나라의 국기(國旗)는 그 나라의 상징이며, 민족정신의 표상이다.

1919년 11월 27일, 독립신문 1면에 ‘태극기’라는 제목의 시(詩)가 실렸다.

풀어보면 ”삼각산 마루에 새벽빛 비칠 때/네 보았냐 보라 그리던 태극기를/네 보았냐 죽은 줄 알았던/우리 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았네/자유의 바람에 태극기 날리네/이천 만 동포야 만세를 불러라/다시 산 태극기를 위해 만세만세/다시 산 대한국(大韓國)”

한일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요즘, 태극기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국기(國旗)로서의 권위와 존경을 보여줘야 할 때다. ‘다시 살아난’ 태극기를 담을 ‘국기함’을 하나씩 가슴속에 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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