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석 우 논설위원/문학평론가

이 석 우 논설위원/문학평론가

[동양일보]괴산군 칠성면 갈읍리에서 출생한 박씨는 괴산군 향토연구 회원으로 30년 이상 활동하고 있으며 괴산군지 칠성면 편집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지역발전에 관심이 큰 분이다. 오래전에 칠성면의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제보를 통해 언론에 그 진상을 보도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의 제안으로 칠성면의 보련원들의 ‘죄가 없으므로 의심 없이 따라간 죽음의 행렬’을 당시 젊은이들의 심정을 헤아리며 답사하기로 한 것이다.

박씨는 5대 독자로 칠성면 보도연맹 사건 때 아버지(당시 31세)를 잃고 말았다. 그는 6세의 어린 나이로 6.25를 맞은 까닭에 동네 어른들께서 소달구지로 실어 온 희생자들을 사람들의 통곡소리 틈으로 슬프게 바라본 기억밖에 없다고 하였다.

장마가 한창이던 1951년 7월 7일 칠성 도정리에 있는 지서 마당에서는 괴이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면내에서 소집된 130여 명의 보련원들을 광목으로 옭아매어 괴산을 거쳐 증평지역으로 이동되려는 것이었다. 일테면 보련원의 예비검속을 진행하려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것이 웬일인가. 지금 당장 포박을 한다는데도 반항하거나 도주할 궁리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갈읍리 출신 손해일 순경은 너무나 황당하고 안타까웠다. 그는 예비검속의 포박을 받으려고 줄지어있는 보련원들에게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라며 도주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지서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아무 죄가 없으므로 아무 의심도 없이 당당하게 광목천의 포박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겠다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괴강의 물이 불어 도저히 건너갈 수가 없었다. 광목천으로 굴비처럼 엮여서 CIC 대원의 지시로 산길로 우회하기 시작하였다. 외사길을 따라 들어섰으나 현재의 칠성댐 밑의 돌다리 위로 물이 아슬아슬 넘치고 있었다. 이 위험한 물길을 건너는 것보다 도망치는 것이 생존의 확률이 높아 보였으나 아무런 동요도 없이 오직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하늘에 물으며 시뻘건 장마 물길을 건너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하늘에 대한 물음을 전쟁의 비이성적 광기에 빠져버린 당시의 정부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강물을 겨우 건넌 사람들이 강둑에 집합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곳 외사리, 사은리, 갈은리의 사람은 한 사람도 끼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이곳에 서 있는 공적비의 주인공 김준형 선생의 덕분이었다. 이곳 봉서재에서 81세까지 서경을 강론하다 눈 감으신 선생께서 당시 이 향리 사람들의 보도연맹 가입 자체를 막은 까닭이었다. 선생의 시국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40명 이상의 향리 젊은이들을 구한 것이다. 지금 선생은 보련원들이 옥녀봉 죽음의 골짜기로 향하기 위해 운집해있던 그 장소에 장래를 예측한 슬기로운 현자로 칭송받으며 서 있다.

죽음의 사육제로 향하는 광목천의 행렬은 현재 외사분교 자리의 느티나무 밑에 잠시 발을 멈춘다. 뜨거운 태양을 피하라고 철마다 아버지 같은 그늘을 던져주던 이 나무 위의 매미 소리와 그를 따라 내려오는 그 서늘한 바람을 다시 맛볼 수 없을 터이다. 이동 중에 끌려오는 사람들끼리 귀동냥 정보로 자신들이 위급 지경임을 알아차렸을 법도 하건만, 오직 믿고 의지하는 생각은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는 말뿐이었다.

숲이 터널처럼 깊은 명태재를 넘었다. 얼마나 많은 날을 넘나들던 고개이던가. 어여쁜 자신의 새색시가 가마를 타고 넘어오지 않았던가. 그 고개를 이제 고운 아내를 그냥 두고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넘으려는 참이었다. 장마 물길에 밀리고 밀려 산기슭을 비뚜루 돌아 괴강의 꽃바위 여울에 닿았다. 조여오는 광목천을 당겨 보면 “개가 무슨 죄가 있는가?” 되뇌였다. 휘파람 소리를 내며 꽃바위여울을 휘도는 물줄기는 아무 답이 없다. 그래도 산안개에 감겨 있는 동네 앞산이 위안처럼 눈에 들어왔다. 이 행렬은 괴산을 거쳐 증평양조장에 7월 7일 도착한다. 이틀 동안 구금되었다가 7월 9일 옥녀봉에서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는 죽음보다 강한 신념과 함께 사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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