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박장미 기자]●강제연행 문제



15년 전쟁과 재일조선인이라는 시대 상황을 살펴볼 때 그 한쪽 끝에 ‘협화사업’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한쪽 끝에는 강제연행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중국 침략, 아시아 침략으로 이어지는 전쟁 확대에 의한 것으로, 조선 사람을 강제로 동원해 전쟁에 협력하게 한 문제이다. 여기에는 중요 산업의 노동력으로 연행된 경우와 직접 군인·군속으로 징용된 경우 두 가지가 있었는데 어느 쪽이든 식민지 통치에 신음하는 조선인을 다시 중국과 여러 동남아시아 국민들과 싸우게 하는 이중의 고통을 짊어지게 한 정책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939년에 ‘국민징용령’이 나오고 노동력 동원계획이 세워졌는데, 그 일부로서 조선인 노동자를 중요 산업으로 연행하도록 결정됐다. 이것이 강제연행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조선인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각 사업장이 직접 모집에 나섰지만 전쟁이 격화되고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짐에 따라 국가 권력을 총동원해 노무자를 모집하고(1942년 관청의 알선제), 이어 징용령이 적용됐다(1944). 이로 인해 겨우 6년 사이에 무려 72만5000명의 조선인 청장년이 일본으로 연행돼 탄광(34만), 토목공사(11만), 광산(7만) 등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며 6만명이나 되는 사망자와 무수한 도망자를 내었다. 이는 20세기판 노예사냥이었다.



서울에서 가구점에 근무하며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던 한 청년의 이력은 그 하나의 전형일 것이다.

1942년 3월 직장에서 퇴근하던 그를 경관이 불러 세웠다. 그리고 바로 경찰서로 연행된 이 청년은 그대로 빈 도시락 하나 달랑 들고 67명의 무리와 함께 홋카이도로 끌려갔다.

거기에서 돼지우리 같은 숙소에서 무밥을 먹으며 평균 12시간에 달하는 채탄 노동에 강제 동원됐다. 영양실조와 과로로 동료들이 힘없이 쓰러져 갔다. 4개월 후, 이번에는 지시마의 우르프 섬으로 옮겨져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다. 새벽 3시부터 오후 7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가을을 넘기고 겨울이 되자 동상을 무릅쓰고 운반차를 밀었다. 1943년 11월 비행장이 완성되자 우르프 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다시 홋카이도의 끔찍한 합숙소 다코방으로 돌아와 채탄 일을 계속했다. 이듬해 4월, 다시 캄차카반도 바로 앞에 위치한 가타오카 섬으로 끌려가 혹한과 미군의 공습 속에서 비행장을 확장하고 방공호를 파는 공사에 종사했다. 어느 날, 방공호를 파려고 다이너마이트를 다루다가 자연 폭발로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반이나 날린 그는 의식을 잃은 채 숙소로 옮겨졌다. 일본인 반장은 “발파 하나 제대로 못하나, 이 자식…, 이 반도새끼, 빨리 죽어 버려!”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따귀를 올려붙였다. 입원해 있던 중에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는 거의 반미치광이가 돼 버렸다. 완전히 낳지도 않은 사태에서 수송선에 올라타 다시 홋카이도 합숙소로 돌아온 그는 여기에서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일본제국주의는 20대의 한 청년의 청춘을 이처럼 짓밟아 버린 것이다.

조선인 노무자의 일본 연행과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인 청장년을 군인·군속으로 내몬 것이다. 이미 ‘육군특별지원병령’(1940), ‘해군특별지원병령’(1943)을 발표해 1943년까지 약 1만 명의 조선인을 병사로 연행하고, 1944년에는 징병령까지 적용해 대대적인 군사 동원을 추진했다. 그 결과 육군 18만7000명, 해군 2000명의 조선인이 병사로 동원됐다. 그 외에 군속으로 주로 남방으로 파견돼 비행장 건설 등에 종사했는데, 그 수는 14만명 이상에 달했다. 정확한 숫자를 들면(실제로 그보다 훨씬 많다), 군인·군속을 합쳐 36만5000명에 달했다. 이 밖에 많은 조선 여성이 위안부로서 전선에 동원됐다. 이들 중 다수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을 뿐 아니라 전쟁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전쟁과 재일조선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종래 주로 강제연행의 측면에 집중됐지만,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조선인 피폭자 문제이다. 원폭이 투하될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각각 수만 명의 조선인이 있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조선인은 1만명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그 중 광복 후 한국으로 귀국한 자는 8000명(이 중에 3000명은 그 후 사망), 북한으로 돌아간 자가 2000여 명, 일본에 잔류한 자가 수천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의할 점은 이 피폭자 문제에서도 민족차별이 관철됐다는 것이다. 조선인 피폭자는 전후에 구제도 받지 못한 채 일본의 국가와 사회의 기억에서 지워져 버렸는데, 피폭 당시에도 그 일례가 발견된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한 조선인은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도 못 느낀 채 맨몸으로 히지산(比治山)으로 피난을 갔다. 겨우 구호소를 발견했지만, 텐트 위로 나부끼는 일장기를 보고는 치료를 포기해 버렸다고 한다. 간토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이 떠올라 다시 그 전철을 밟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족차별의 역사는 한 재일조선인의 정신 구조에 반영돼 일관적으로 그 행동을 규제한 것이다. 재일조선인의 원폭 피폭은 디딤돌과 같은 전전(戰前) 재일조선인의 존재 양식을 상징하는 사건일 것이다.



Ⅲ. 동화교육의 사회체제화 -천황제 체제하의 재일조선인 교육-

광복 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살고 있는 조선인 자녀들이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일본인 학교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일본의 교육체제 안으로 편입됨으로써만 교육의 기회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재일조선인 자녀들의 동화교육이 필연적이 될 수밖에 없고, 반면 일본 사회 측에서는 그 의미를 대상화시켜 인식할 만한 내발적 계기가 부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자연 성장적인 상황이 돌출된 시기가 소위 협화 교육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이 일본의 교육체제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들어가는 주체의 성장 정도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 문제가 생겨난다. 즉, 중 학생 혹은 대학생으로 들어갈 경우와 소학생으로서 취학할 경우인데, 교육을 받는 당사자로서는 자신이 받는 교육의 의미나 그 이해가 달랐을 것이다.

중·대학생인 경우, 대개 이미 민족적 자질의 토대가 형성된 후보다 높은 학습을 지향해 일본으로 건너온 것이다. 당사자의 자각 정도를 볼 때 ‘유학생’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다. 민족광복의 여러 운동과 관계되는 부분도 많았다. 일본 정부 측도 사상문제·치안 문제로서 조선인 중·대학생의 동향을 감시·제압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비해 유·소년기에 일본에 건너왔거나 유·소년 시절부터 일본에서 자라나 소학교에 편·입학한 경우는 오히려 일본의 교육을 동화교육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다. 어릴 때부터 민족적 형성이 가능한 환경에서 단절된 채 일본인 소학교에 들어간 것이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이들 아동의 대부분은 일본에 생활 근거를 둔 재일조선인의 자녀였다. 이러한 상태는 다분히 광복 후 재일조선인의 교육문제와 그 길을 같이 하는 것으로 그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광복 전 재일조선인의 교육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상황에 입각해서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동화교육 체제가 광복 전·후로 연속된다는 시각하에, 문제를 후자로 좁혀서 다루고자 한다. 전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제2부 제1장에서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재일조선인 아동의 사회적 위치



●학령아동의 증가

일본으로 건너가는 조선인이 증가함에 따라, 뒤따라서 일본으로 가기도 하고 혹은 일본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기도 하면서 그 자녀의 수도 점점 증가했다. 이에 따라 학령아동 수로 더욱 많아졌지만, 정확한 통계는 불분명하다. 다나카 가츠미(田中勝文)의 추정에 따라 그 대략적인 수자를 가늠해보면 다음과 같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쇼와기에 들어와 재일조선인의 학령아동의 증가가 두드러진다. 그 증가 형태는 광복 후와는 달리, 조선에서 건너온 아동과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 아동 양쪽 모두 증가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국적인 상황도 흡사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1936년 고베 시에서 만 15세 이하 아동 7075명 중 조선 태생 2837명, 일본 태생 4238명으로 일본 출생률은 60%로 보고되고 있다. 아내를 조선에서 불러들여 일본에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재일조선인의 대부분의 결혼 형태이다. 따라서 그 수가 증가하면서 당연히 일본 태생의 조선인 아동도 증가한다. 그리고 그 수는 해를 거듭함에 따라 불어나고 반대로 조선에서 건너오는 아동의 비율은 감소됐다. 광복 후 재일조선인에게 지배적인 문제였던 민족적인 생활로부터 단절된 재일조선인 자녀와 그 교육문제의 성격이 이미 1935년을 전후해 나타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의무취학의 기본 방침

그런데 당시 이들 아동이 정규학교에 취학하려 하면 일본인학교에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본의 교육으로서 이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한 번은 검토돼야 했다. 이 문제는 공식적으로 주무관청이 척무성 조선부(拓務省 朝鮮府)에서 문부성에 조회하는 형태로 부상했다.

1930년 5월 척무성 조선부는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인 학령아동은 소학교령 제32조(취학의무규정 조/인용자)에 의거, 그 보호자에게 취학 의무를 지게 할 것인가?”라고 조회하고, 동년 10월 문부성 보통학무국은 “일본 거주 조선인은 소학교령 제32조에 의거 학령아동을 취학시킬 의무를 진다”고 회답했다. 재일조선인 자녀의 교육은 의무교육으로 한다는 견해가 표명된 것이다. 이와 같이 취학 의무라는 말로 동화교육의 방침이 제시된 점에서 식민지 조선(동화교육 정책을 선행하고 의무교육을 행하지는 않았다)과는 다른 재일조선인 교육에 대한 정책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문부성의 견해는 삼단논법적인 법령 해석에 의해 유도됐다. 후나코시 겐이치(船越源一: 문부성 교육조사부)의 성명에 의하면, ‘조선인도 일본인’이고 소학교령은 ‘지역적인 속지법’이기 때문에,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지만 “일본에 와서 살고 있는 조선인 학령아동은 소학교령의 적용을 받는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 같은 방침도 ‘협화회’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오히려 원칙론으로 표시되는데 불과했다.

실제로는 문부성도 “이를 시행하기에는 지금 설비가 충분하지 않다고 하므로, 의무가 있다고 해석은 하되 그 시행은 얼마간 조절을 한다든가, 일본인과 똑같이 모두에게 의무조항을 적용하는 것을 다소 조절하고 있는 형편만” 여유가 없을 때는 취학 대상자의 부모가 “입학을 신청할 경우에 한해 보통 소학교에 넣어 주는” 조치를 취했다. 일본인 학생을 수용하고 나서 여유가 있을 때 재일조선인 학생을 받아들인다는 당국 측의 자세는 이때만의 일이 아니고, 광복 후에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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