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김영이 동양일보 상무이사 겸 편집국장

[동양일보 김영이 기자]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청주 출신이 여섯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손병희, 신홍식, 권병덕, 권동진, 정춘수, 신석구 등 6명이 영웅들이다. 청주사람의 긍지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항일도시가 혼이 없는 맹탕 도시가 됐다.

일본의 경제전쟁 도발로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현재로선 관계개선이 언제 이뤄질지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다.

올해는 특히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어서 일본의 경제전쟁 도발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치솟게 하고 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고, 일본을 찾는 관광객이 줄어 일부 항공기 노선이 폐쇄되는 데서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대한국 수출 감소 폭이 우리의 대일본 수출 감소 폭의 23배나 된다는 소식도 있다.

일본의 경제전쟁 도발이 본격화되자 ‘충북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기념사업추진범도민위원회’는 충북도청 담장에 30여장의 일본 규탄 및 일본 제품불매 독려 현수막을 내걸었다.

노란색 바탕에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문구를 비롯, 시민들의 대일본 결기를 다지게 하는 내용들로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며칠 후인 지난 8월8일, 같은 장소에 보는 사람들의 눈을 의심케 한 이상한 현수막 20여장이 등장했다.

‘충북자유민주시민연합’이라는 단체가 내 건 현수막인데 내용이 가관이었다. ‘문재인발 한·일 갈등 국민만 죽어난다’, ‘문재인은 과거와의 전쟁 중단하고 미래비전 제시하라’, ‘일본과 싸워야 총선에 유리하다고?’, ‘더불어민주당은 해산하라’ 등 일본 규탄 및 일본 제품 불매 국민운동과 대통령을 비난·비하·비아냥거리는 내용들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햇빛이 쨍쨍한 날에 우산 펴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우리는 정상으로 보지 않는다.

충북자유민주시민연합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현수막으로 인해 많은 시민들의 눈총을 받았다. 일본의 경제 도발로 전 국민이 분개하고 하나로 뭉쳐 극일(克日)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외치는 판국에 뚱딴지 같이 왜 저런 내용의 현수막을 들고나왔는지 시민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현수막을 내 건 자리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심지어 ‘저의’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샀다. 노란색 바탕의 일본규탄 현수막 바로 위에 걸린 현수막 바탕색 역시 노란색이었다. 똑같은 색깔의 노란색 물결에 휩쓸려 있어서 자세히 보지 않고선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한·일 갈등이 문재인 정권 탓이고 일본과의 싸움을 내년 총선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을 십분 이해한다 치자. 그래도 정권 비난 현수막은 걸 때가 따로 있고 건다면 다른 곳에 했어야 했다. 일본 규탄 현수막이 걸린 도청 담장이 아니더라도 청주시내에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현수막 게시 주체가 누구든 간에 대일(對日) 전선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는 무례한 행위로 인식되고 시민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일본과의 자존심 싸움(反日)에 국내 정치 갈등(反文)을 덧씌워 어떤 이득을 취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큰 착각이다. 반일과 반문을 구별 못할 정도로 어리숙한 시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수막 갈등이 빚어지자 청주시는 광복절 사흘전인 지난날 12일 모두를 전격 철거했다. 불법게시물로 인지한 이상 청주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민들에게 진보와 보수, 좌우 진영의 싸움으로 비쳐져 눈살을 찌푸리게 한 ‘현수막 사건’은 이렇게 해서 일단락됐다.

문제는 일본 규탄과 불매운동을 독려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청주시내에서 좀처럼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아마 이런 모습은 전국 어느도시에서도 찾기 힘든 기이한 일일 것이다.

충북자유민주시민연합이라는 단체가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현수막을 다른 곳에 게시했다면 지금도 각자의 주장을 시민들에게 전파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을 것이다. 시내 중심가에 일본 규탄 관련 현수막 하나 없는 ‘맹탕 도시’ 청주. 충북자유민주시민연합이 이를 노렸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됐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렸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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