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 시인·청주문화재단 본부장

[동양일보]2013년 6월 13일은 단옷날, 어머니 생신이었다. 식사하고 서둘러 돌아오는데, 서울의 문단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시조의 날과 병행하여 만해축전을 여는데, 낭송을 하란다. 원래 7월 21일이 시조의 날이지만, 올해는 하루 당긴다고 했다. 낭송을 잘 못할뿐더러, 갖은 기교를 부리는 낭송 풍경이 별로 달갑지 않은 터라, 정중히 거절하다 혼쭐만 났다.

전화를 끊으며 뜬금없이 불길한 생각이 스친다. 예상 못한 시련이 왜 생기지? 서양에서 숫자 13은 불운의 상징이라고 학창시절 배웠다. 예수를 팔아넘긴 ‘가롯 유다’가 최후의 만찬 13번째 참석자이고, 아폴로 13호 사고 날짜도 13일이며 발사 시각도 1시 13분이라고 들었다. 영웅 축하 잔치에 12신만 초대했는데, 불청객으로 온 악의 신 ‘로키’를 쫓아내다 가장 사랑받는 신 ‘발더’가 죽었다는 노르웨이 신화도 떠올랐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낭송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 시조 낭송이니 우리 소리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소문하여 판소리 명창을 찾았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낭송할 시를 골라 작창을 부탁했다. 배우는 한 달이 전광석화처럼 흘러갔다.

서울 충무아트홀, 기라성 같은 시인 수백 명이 자리에 가득하다. 다행이도 12명 중 11번째다. 역시나 이런저런 낭송 기교가 흘러넘친다. 나는 쥘부채를 들고 나갔다. 아니리와 창을 섞어 가며 흥얼거린 이종문 시인의 ‘입적’,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한 원로 시인은 낭송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며 극찬도 했다. 이후 이런저런 행사에 꽤나 불려 다녀야 했다.

그해, 그러니까 2013년 8월에 승진하며 안전 담당부서 과장으로 보직을 받았다. 행정안전부로 명칭까지 바꾸며 안전을 강조하던 시기다. ‘어떻게 도민 안전의식을 확산하지?’ 고민하다 유튜브를 만들었다. 친숙한 민요 ‘쾌지나칭칭나네’ 가사를 안전수칙으로 개사했다. 전기코드 뽑고, 가스밸브 잠그고, 눈 치우고 등등. 내가 선소리를 하면 직원들이 후렴을 메기는 방식이다. 모든 행사 시작 전에 영상을 틀고, SNS로 살포하면서 안전의식이 은연중에 스며들기를 소망했다. 역시 그해 10월, 판소리 선생님이 제안한다. 흥보가 완창 동아리를 모집하는데, 참여하겠냐는 것이다. 우리 소리에 관심이 많아 보여 추천한단다. 그래서 판소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낭창낭창’이라고 동아리 이름도 지었다. 가늘고 긴 물체가 탄력 있게 흔들리는 모양이란 본뜻 외에, 한자로 ‘朗唱’이라 음차하여 밝은 소리로 세상을 비추자는 의미도 덤으로 담았다.

어쩌면 우리는, 문화사대주의에 갇혀 있다. 영어 철자나 한자 획수를 틀리면 얼굴이 확 달아오르면서도 한글맞춤법 틀리는 것쯤은 당연시한다. 샹송이나 팝송은 우아하게 여기고 민요나 판소리는 고루하다고 폄하한다.

이렇게 시작한 판소리는 내 일상에 활력으로 자리한다.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신비로움에다, 긴 가사를 암기하는 재미도 있다. 치매 예방에도 도움 된다니 감사한 일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문화의 맥을 이어간다는 자긍심에 뿌듯하다.

판소리와의 인연이 시작된 2013년 6월 13일은, 13이 두 개나 있다. 서양인도 아니고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불길할까 염려하다니 참 어이없다. 내게 행운으로 다가온 숫자 1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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